뿐만 아니다. 애니팡 게임머니인 ‘하트’ 전송으로 발생하는 데이터 통신비용이 하루 평균 4억~20억원이란 조사보고서까지 나왔다. 애니팡 고득점 비결을 올린 블로그에는 네티즌들이 몰린다. ‘체인지팡팡(개발사 NHN한게임)’ ‘보석팡(바른손크리에이티브)’ ‘캔디팡(위메이드엔터테인먼트)’ 등 애니팡과 비슷한 게임들도 인기를 얻고 있다.
아주 흔한 색깔 맞추기 퍼즐에 불과한 이 게임에 대관절 왜 이렇게 난리일까? 게임처럼 인생도 ‘팡~’하고 터진 ‘애니팡의 아버지’ 이정웅(31) 선데이토즈 대표의 성공담을 들어봤다.
일탈로 싹튼 꿈
명지대 컴퓨터공학과 출신인 이 대표는 친구들이 취업 준비에 한창이던 대학 4학년때 일탈을 감행(?)했다. 미국 교환학생 시절 자동차로 미국 대륙 횡단에 나서 한 달 동안 1만6000km(시카고→LA→시애틀)를 내달렸다. 고행 길은 그를 변화시켰다. ‘취업이냐 창업이냐’를 두고 갈등했던 그에게 창업의 꿈은 싹트기 시작했다.
여기에 2004년부터 2007년 초반까지 NHN한게임에서 병역특례요원으로 대체복무를 할 때 게임 개발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이 대표는 “한게임에서 퍼즐을 소재로 한 플래시 게임을 3년간 만들었던 게 지금의 애니팡을 만드는 밑거름이 됐다”고 회상한다. 창업 의지와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2009년 1월 선데이토즈를 설립, 본격적으로 소셜네트워크게임(SNG)에 도전장을 내던졌다.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갔던 시절은 페이스북과 징가(Zynga)라는 미국 대표 소셜게임업체가 막 주목을 끌던 때였죠. 징가의 SNG ‘팜빌’은 한게임에서 만들었던 플래시게임과 모양새는 얼추 비슷했지만, 분명히 다른 한 가지가 있었어요. 바로 소셜을 활용한 비즈니스모델 말이죠.”
애니팡의 성공 신화에 얽힌 또다른 일화가 있다. 이 대표는 지난 2010년, 카카오가 게임센터 서비스를 내놓기 전에 먼저 카카오를 찾았다. 그리고는 모바일메신저에 소셜게임을 연동하자고 불쑥 제안했다. 당시 카카오 직원들은 철저히 보안을 유지하며 1급 기밀에 부쳤던 프로젝트였던 터라 혹시 정보가 밖으로 샌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카카오톡이 가장 강력한 소셜그래프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크게 뜰 줄은 저도 몰랐어요. 미니홈피 ‘싸이월드’에서 가능성을 엿보기는 했지만 지금과 같은 흥행몰이에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사실 애니팡은 온라인버전으로 처음 만들어져 가장 먼저 싸이월드와 연동했다. 하지만 2009년에 싸이월드 인기가 한풀 꺾이면서 게임도 덩달아 빛이 바랬다.
“트렌드가 한참 지난 퍼즐게임에 내 돈을 투자하라고?” 이대표가 만난 퍼블리셔나 투자자들 모두 이렇게 말하며 혀를 찼다고 한다. 그는 “게임분야에선 항상 생각지 못한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터진다’라는 말을 마치 은어처럼 쓰죠. 그런데 터진 게임 대부분은 정해진 프레임을 벗어났을 때 나왔던 것 같아요.”
2개월만에 일매출 1억 이상
애니팡의 성공비결은 운도 한 몫 했지만, 그만큼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확신을 갖고 뚝심있게 밀어부친 결과였다. 여기에 △남녀노소 누구나 간단하게 즐길 수 있는 게임조작법 △모바일 특성에 맞도록 플레이 타임을 짧게 잡은 점 △모바일메신저 카카오톡 연동으로 게임유저들이 짧은 시간에 게임을 공유할 수 있게 한 점 등 최근 트렌드와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하루 평균 매출 1억원 이상, 월 매출 40억원을 웃돌고 있는 인기 모바일 SNG 게임 ‘룰더스카이’를 누른만큼 애니팡의 일매출 규모는 1억원 이상이 될 것으로 업계에서는 보고 있다. 이 중 구글이나 애플의 앱 마켓과 카카오에 수수료 일정부분을 지불하고 나면 선데이토즈의 매출은 약 50% 정도가 된다.
이정웅 대표는
1981년생으로 2000년 명지대학교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했다. 병역특례로 2004년부터 2007년까지 NHN 한게임에서 근무했으며, 졸업 후 대학 동기인 임현수 CTO와 박찬석 운영이사와 함께 2009년 1월 선데이토즈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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