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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용운 기자] 구체적인 형상이 없다. 색상도 한두 가지가 전부. 눈에 보이는 대상을 묘사하는 것이 그림이라고 믿는 이들에게는 ‘이것이 과연 그림인가’ 싶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최근 한국화단을 강타한 사조로 각광 받고 있다. ‘단색화’다.
1970년대 이우환·박서보·하종현·정상화·정창섭·김기린·윤형근 등이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한 단색화는 1980년대까지 ‘한국의 모노크롬화’라고 불리며 시대를 이끌던 ‘민중미술’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암울했던 군사독재와 민주화운동, 사회현실에는 눈을 감고 독자적인 노선을 이끌었던 거다. 그럼에도 1950년대 서구의 엥포르멜과 1960년대 추상표현주의를 넘어서진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중간색 계열의 단색을 통한 색의 깊이, 자연과 전통의 합일에 매달린 단색화는 어느덧 한국 추상화의 고유명사처럼 세계 미술계에 알려지고 있다. 국내 경매뿐만 아니라 해외 경매와 아트페어에서도 나날이 주가를 높이고 있다.
오는 29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여는 ‘물성을 넘어, 여백의 세계를 찾아서: 한국 현대미술의 눈과 정신 1’ 전은 그 단색화 이후의 한국 추상화를 고민하기 위해 마련한 전시다. 근·현대 한국미술에서 추상화를 단순하게 단색화로만 한정하는 건 문제가 있다는 시각이 단초가 됐다. 단색화를 넘어서는 혹은 단색화와는 다른 한국의 추상화를 재평가해보자는 것이 기획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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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교수는 전시 참여 작가들에 대해 “1970년대 미니멀리즘의 영향 아래 물질 자체의 속성이 두드러지던 화단에서 꾸준히 독자적인 실험을 지속해왔다”며 “이들은 완전히 물질로만 작품을 채우지 않았으며, 오히려 물질을 넘어선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통해 사유의 세계를 작품으로 표현해 나갔다”고 평가했다.
전시장에서 처음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은 이승조의 ‘뉴큘러스’(Nucleus) 연작이다. 이승조는 1960~70년대 산업현장에서 쉽게 볼 수 있던 PVC관이나 실린더를 연상하는 형태의 추상화를 그렸다. ‘뉴큘러스 1986∼1990’은 작가가 타계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이다. 뒷공간 음영의 촘촘한 여백이 여느 단색화와는 다른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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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호의 ‘인터널 리듬’(Internal Rhythm) 연작은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만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마치 부직포처럼 거친 표면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세밀하면서도 규칙적인 구멍과 함께 방울처럼 흩뿌려진 물감의 흔적이 촘촘히 배어 있는 작품. 자칫 편집증적으로 볼 수 있는 단순작업의 밀도는 숨이 막힐 정도다. 그럼에도 한 걸음 물러서서 보면 공간을 지배하기보다 공간의 배경인 듯 되레 자연스럽다.
김 전 교수는 “전시한 작품들의 공통점은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를 넘나들고 있다는 것”이라며 “그 증거가 바로 여백이고, 여백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관념과 사유의 세계를 드러내는 우리 미술만의 고유한 지표”라고 강조했다. 가나아트센터는 이번 전시와 관련한 심포지엄을 이달 중순에 열고 단색화 이후의 한국 추상화의 방향성을 이론적으로도 모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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