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기자 칼럼]'칼레의 시민'은 어디에 있는가

  • 등록 2013-02-04 오전 8:37:57

    수정 2013-02-04 오전 8:37:57

[이데일리 이승형 선임기자] 얼마 전 서울 숭례문 부근 한 미술관에서 오귀스트 로댕이 만든 청동 조각상 ‘칼레의 시민’을 봤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목에 동아줄을 걸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교수대로 향하는 6명의 남성들이다.

이들은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의 항구 도시 칼레를 구한 영웅들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전혀 ‘영웅적’이지 않아서였다. 로댕은 이들을 ‘슈퍼히어로’처럼 미화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그려냈다.

결의와 절망이 엇갈리는 듯한 표정, 회한과 공포가 서려 있는 눈빛. 인간 내면에 가라앉아 있는 본연의 모습이 마치 상형문자처럼 오롯이 새겨진 군상(群像). 보는 이의 감정이 온전히 이입되는 정(靜)과 동(動)의 절묘한 표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작품이었다. 도대체 칼레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1347년 영국왕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영국군은 11개월동안 칼레를 포위한 채 공격했다. 강력히 저항했던 칼레 시민들은 고립된 채 굶주림에 허덕였고, 결국 항복했다. 에드워드 3세는 “시민들을 살려줄테니 대신 6명이 목숨을 내놓으라”는 조건을 제시한다.

혼란에 빠진 칼레 시민들이 제비뽑기 따위를 고민하고 있을 때 이 도시에서 가장 부자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내가 죽겠다”며 나섰다. 그러자 시장, 법률가, 상인 등도 함께 교수형을 자처했다. 이런 이야기의 끝이 그렇듯 에드워드 3세는 이들의 희생 정신에 감복한 왕비의 간청을 받아들여 이들을 살려주고 군대를 철수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유래는 여기서 시작됐다. 프랑스어로 노블리스는 ‘닭의 벼슬’이란 단어가 기원이고, 오블리제는 ‘달걀의 노른자’란 의미다. 닭의 사명이 자신의 벼슬을 자랑하는 데 있지 않고, 알을 낳는 데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벼슬들만 번쩍이고, 알은 구경하기 힘들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실천하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보고 감탄하기 보다는 그들이 자행하는 ‘반칙과 특권’을 보며 절망하는 일이 마치 일상처럼 됐다.

지난 한달만을 돌이켜봐도 그렇다. 국민들은 정초부터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와 국무총리 지명자의 온갖 의혹을 보며 실망해야 했다. 뇌물먹은 정권 실세들이 ‘초고속 사면’되는 현실에 분노해야 했다.

그런데 국민들을 더 허탈하게 하는 것은 이 볼썽 사나운 ‘꼴불견’을 둘러싼 갖가지 핑계들이다. 자신의 허물을 탓하기 보다 남의 지적을 나무란다. 자기 식구들을 챙기는 데 열을 올리면서 감히 원칙을 들이댄다.

국민들은 이들에게 대단한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했던 것이 아니었다. 영국 왕실의 윌리엄이나 해리 왕자처럼 군 복무를 하며 전쟁터에 나가라고 등 떠민 것이 아니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처럼 69조원의 전 재산을 타인의 생명을 살리는 데 쓰라고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상식’ 수준의 평범한 도덕성을 원했다.

그렇다면 입이 열개라도 말이 없어야 할 터.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말이 많다. 국민들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듯’ 해서 인가. 다른 것은 다 차치하고, 국민들의 몸과 마음을 아프게 한 죄는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가.

우리 국민들도 이제 ‘칼레의 시민’을 보고 싶다. 몸도 마음도 추운 겨울이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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