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의 항구 도시 칼레를 구한 영웅들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전혀 ‘영웅적’이지 않아서였다. 로댕은 이들을 ‘슈퍼히어로’처럼 미화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그려냈다.
결의와 절망이 엇갈리는 듯한 표정, 회한과 공포가 서려 있는 눈빛. 인간 내면에 가라앉아 있는 본연의 모습이 마치 상형문자처럼 오롯이 새겨진 군상(群像). 보는 이의 감정이 온전히 이입되는 정(靜)과 동(動)의 절묘한 표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작품이었다. 도대체 칼레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1347년 영국왕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영국군은 11개월동안 칼레를 포위한 채 공격했다. 강력히 저항했던 칼레 시민들은 고립된 채 굶주림에 허덕였고, 결국 항복했다. 에드워드 3세는 “시민들을 살려줄테니 대신 6명이 목숨을 내놓으라”는 조건을 제시한다.
혼란에 빠진 칼레 시민들이 제비뽑기 따위를 고민하고 있을 때 이 도시에서 가장 부자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내가 죽겠다”며 나섰다. 그러자 시장, 법률가, 상인 등도 함께 교수형을 자처했다. 이런 이야기의 끝이 그렇듯 에드워드 3세는 이들의 희생 정신에 감복한 왕비의 간청을 받아들여 이들을 살려주고 군대를 철수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벼슬들만 번쩍이고, 알은 구경하기 힘들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실천하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보고 감탄하기 보다는 그들이 자행하는 ‘반칙과 특권’을 보며 절망하는 일이 마치 일상처럼 됐다.
지난 한달만을 돌이켜봐도 그렇다. 국민들은 정초부터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와 국무총리 지명자의 온갖 의혹을 보며 실망해야 했다. 뇌물먹은 정권 실세들이 ‘초고속 사면’되는 현실에 분노해야 했다.
국민들은 이들에게 대단한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했던 것이 아니었다. 영국 왕실의 윌리엄이나 해리 왕자처럼 군 복무를 하며 전쟁터에 나가라고 등 떠민 것이 아니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처럼 69조원의 전 재산을 타인의 생명을 살리는 데 쓰라고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상식’ 수준의 평범한 도덕성을 원했다.
그렇다면 입이 열개라도 말이 없어야 할 터.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말이 많다. 국민들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듯’ 해서 인가. 다른 것은 다 차치하고, 국민들의 몸과 마음을 아프게 한 죄는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가.
우리 국민들도 이제 ‘칼레의 시민’을 보고 싶다. 몸도 마음도 추운 겨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