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보니 줄곧 엘리트 코스를 걸으면서도 시련과 굴곡도 많았다. 결국 수석 부행장을 끝으로 우리은행을 떠나는 듯했지만, 절치부심 끝에 1년 만에 우리은행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기 직전인 2008년 6월 취임한 탓에 가시밭길의 연속이었지만 특유의 우직함으로 무사히 높은 파고를 헤쳐나올 수 있었다.
위기의 순간 소방수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던 이 위원장을 만났다. 인터뷰는 그의 집무실에서 이뤄졌다. 저금리, 저성장의 시대에 다시 위기로 내몰리고 있는 금융권을 향해 그가 던진 화두는 ‘기본과 원칙’이다. “바둑을 두다가 수가 안 보이면 새로 둬야 합니다. 어려울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더디더라도 정도로 가다 보면 나중엔 그 길이 가장 빠른 길이 됩니다.” 그의 훈수는 단순하고 또 명쾌했다.
“위기의 시기엔 위험관리로 금융회사의 우열은 물론 존립 여부가 가려집니다. 그래서 개인과 기업에 대한 심사 및 평가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노련한 전문 뱅커답게 구체적인 전략도 잊지 않았다.
차별화된 경쟁력도 강조했다. “국내 은행은 백화점식으로 경쟁력이 고만고만합니다. 국민은행은 소매금융, 우리은행은 기업금융, 하나은행은 PB가 강하다고 하지만 규모의 차이일 뿐 상품이나 서비스 내용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의 지적은 따끔하고 날카로웠다. 이젠 규모의 경쟁에서 벗어나 특화된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하는 질적 경쟁에 나서야 한다는 주문이다.
최근 금융권을 향한 탐욕 논란에 착잡한 심경을 표현했다. “예금과 대출금리는 일종의 가격인 만큼 당국이 직접 개입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은 어려운 시기인 만큼 금융회사의 역할이 큽니다. 사회공헌 확대가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는 만큼 균형점을 잘 찾아야 합니다.” 사회적 역할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갖고 위기를 오히려 반전의 기회로 활용하라는 조언이다.
신용회복위원장은 이 위원장에게 제2의 금융인생이다. 40년간 갈고 닦은 금융 노하우를 사회를 위해 베풀 기회이자 또한 사명이기도 하다. 그는 작년 4월 취임 후 때론 우직하게 때론 저돌적으로 신복위의 외연을 넓혀가면서 금융 소외계층의 재기를 돕는 든든한 후원군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 대통령 주재 회의에서 예정에 없던 소액대출 재원 지원을 요청해 새롭게 500억원을 확보한 건 잘 알려진 일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
이 위원장은 특히 법원으로 가기 전에 신복위의 사전 상담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찾아가는 재무상담서비스’를 도입해 신용회복 지원제도를 잘 알지 못하는 중소도시 서민들을 직접 챙기고, 이젠 국내 채무로 애로를 겪고 있는 해외 동포를 위한 채무상담도 계획하고 있다.
“신복위가 올해로 열 돌을 맞았습니다. 대나무가 한 마디 한 마디 성장하는 것처럼 그동안 문제점을 잘 보완하고 인지도를 높이면 앞으로의 역할도 더 커질 것입니다.” 금융 소외계층이 마지막까지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겠다는 그의 다짐엔 따뜻한 금융 역사를 써내려가는 그의 온화함이 그대로 묻어 있다.
→ 이종휘 신용회복위원장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1970년 우리은행의 전신인 한일은행에 입행했다. 우리은행 경영기획본부장과 수석 부행장 등을 거쳐 2008년 6월부터 2년 9개월간 우리은행장을 역임했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 등이 대학 동기다. 취미는 등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