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모처럼 나선 여행이니까 모두 견문을 넓히고 재충전하는 행복한 여정이 되었기를 기원한다. 다만 한 가지, 명절 때 해외여행을 가는 것이 ‘고향에 살아계신 부모를 뵙지 않아도 되고 돌아가신 조상을 소홀히 해도 된다.’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은 아니기를 바라고 싶다. 왜냐하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사람답게 사는 도리를 지키는 것이 첫째이고, 또 그중 부모에 대한 효도와 조상에 대한 공경이 가장 먼저다.
왜 부모에 대한 효도와 조상에 대한 공경이 제일가는 인간의 도리일까? 효도와 공경은 동물은 절대 못 하고 인간만이 할 수 있다. 효도는 동물적인 본능이 아니고 문화적 학습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어느 나라보다도 이것을 철저히 가르쳤다. 어린 시절 무릎교육과 밥상머리 교육이 그 생생한 출발점이었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우리나라의 별칭도 따지고 보면 여기에 근거한다. 40여 년 전에 방한했던 20세기의 석학 아놀드 로인비(1889–1975)도 바로 우리의 효도문화를 극찬했던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왜 효도를 이처럼 강조하는 것일까? 명백한 이치가 한둘이 아니다. 먼저, 효도는 나를 낳고 길러준 이 세상의 크나큰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효도가 만행(萬行)의 근본으로 꼽히는 이유이다.
끝으로, 노후 행복을 위해서도 효도를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데, 그 가운데 노인 자살률은 특히 높다. 노인자살이 거의 없던 나라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몇 해 전 우리나라의 학대 받는 노인들에게 가해자를 물었더니 응답자의 85%가 가족이라고 했단다. 작년에는 학대 장소를 물었더니 집이라는 답변도 90% 가까이로 나타났다. 집에서라면 가족 말고 누구이겠는가? 효도가 메말라가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효도와 공경은 위로는 돌아가신 조상과 부모를 공경하고 숭배하는 가풍을 만들고, 횡적으로는 형제 세대 간에 화목이 넘치는 끈끈한 인간관계로 뭉치게 하며, 아래로는 자라나는 후손들이 효도와 우애를 배우는 산 교육기회를 제공한다. 효도의 형식은 현실에 맞게 바꾸어나갈 수 있다. 다만, 지금 우리가 명심할 것은 눈앞의 편의나 쾌락에 이끌리거나 육체적, 물질적 부담만을 회피하려고 가장 소중한 사람다움의 도리를 저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다가오는 설날에는 해외여행 인파보다 귀성 인파가 더 늘어났다는 뉴스를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