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시레킷벤키저 영국 본사의) 가습기 살균제 관련자가 안 오고 있지 않습니까. 형사사법공조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가습기 살균제 수사팀 관계자)
“롯데케미칼에서 자료를 제출할 수 없다고 답변이 왔습니다. 일본 사법당국과 형사사법공조를 할 계획입니다.” (롯데그룹 수사팀 관계자)
국경을 넘어선 기업범죄가 늘고 있다. 해외 사법당국에 사법공조를 요청한 사건은 매년 급증추세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연간 100여 건이던 해외 사법공조는 작년에 230건을 넘어섰다. 폭스바겐 배출가스 조작 의혹 사건과 가습기 살균제 피해사건이 대표적이다. 독일과 영국에 거주 중인 본사 임원에 대한 수사가 범죄사실 확인을 위해 필요하지만 사법권이 닿지 않는다. 롯데그룹 수사도 마찬가지다. 해외 사법당국과 형사사법공조로 풀어가야 하는데 강제력이 없다는 게 한계다. 해당국의 협조를 이끌어 내기 위한 사법당국의 외교적 노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소환 불응·자료제공 거부로 수사 난항
롯데수사팀은 일본롯데물산이 롯데그룹 비자금 조성에 일조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법무부에 최근 사법 공조 요청서를 보냈다. 일본롯데물산 쪽에서 자료 공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일본롯데물산이 롯데케미칼의 원료구매에 개입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을 확인하려면 거래 내역 등 관련자료가 필요하다. 조만간 법무부는 일본 쪽에 수사 협조를 요청할 방침이다.
폭스바겐 수사팀은 독일 검찰에 공조를 타진하고 있다. 독일 브라운슈바이크 검찰청이 수사하는 폭스바겐 본사 관계자의 혐의 가운데 배출가스 조작 혐의도 포함돼 있다. 한국 검찰은 현지 법무협력관을 통해 독일 검찰의 수사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수사는 영국 옥시레킷벤키저 본사에 대한 직접 조사는 못 하고 끝날 것으로 보인다. 옥시 본사 전·현직 관계자는 소환 통보에 응하지 않고 있다. 검찰은 지난달 질의서를 보내고 서면으로 조사하는 선에서 수사를 매듭지을 방침이다.
법무부에 따르면, 한국이 외국에 형사사법공조를 요청한 사건은 2013년 109건에서 2014년 183건, 지난해 236건이었다. 주로 외국에 있는 피의자(법인 포함)에 대한 수사 협조 건이다. 범죄 수법이 날로 지능화하고 있어 범죄도 국경을 초월해 발생하는 탓에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외국에서 한국에 요청하는 형사사법공조도 꾸준하다.
다만 형사사법공조 건의 양적 증가가 수사의 질을 보장하진 않는다. 상대국이 수사협조를 거부하면 속수무책이다. 그래서 검찰이 일본과 독일, 영국과 형사사법공조를 타진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수사가 매끄럽게 진행된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검찰 관계자는 “우리 수사 인력이 영국 옥시 본사를 압수수색하고 관련 자료를 박스에 싣고 나오는 그림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형사사법공조가 이뤄진다고 해도 결과를 장담하기는 어렵다. 시간을 끌어 자칫 수사가 길어지면 진실 규명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 오경식 한국형사소송법학회 부회장(강릉원주대 법학과 교수)은 “형사사법공조가 이뤄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쪽의 확인을 받는 수동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수사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日 위안부 피해자 모독 일본인 재판 무기한 연기
현실적인 대안은 범죄인 인도청구다. 상대국 협조로 피고인을 송환하는 것이다. 법제처에 따르면, 한국이 범죄인인도조약을 맺은 나라는 전 세계 30개국이다. 이와 별도로 유럽 47개국이 가입한 범죄인인도에 관한 유럽 협약(European Convention on Extradition)도 유효하다. 법무부에 따르면, 한국이 외국에 범죄인 청구를 한 사건은 2013년 13건, 2014년 28건, 지난해 21건이다. ‘이태원 살인사건’은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아더 패터슨은 지난해 미국에서 한국으로 송환돼 재판에 넘겨졌다. 1심은 징역 20년을 선고했고 지금 항소심 재판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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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국민을 남의 나라에 보내 처벌받게 하는 것은 해당국 정부로서는 부담스러울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다. 이 때문에 범죄인 인도청구는 조건이 까다롭다. 조약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자국에서도 범죄가 되는지를 따진다. 차량공유 서비스 우버(uber)의 공동창업자 트래비스 코델 칼라닉(40·미국) 최고경영자에 대한 송환이 어려운 이유다. 한국 검찰은 무면허 여객운수업을 한 혐의로 칼라닉을 기소했지만 칼라닉은 자국에서 우버 서비스가 불법이 아니라는 이유로 재판에 나오지 않고 있다.
오경식 교수는 “형사사법공조와 범죄인 인도청구는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줘야 한다는 상호주의가 지배하는 외교적 사안”이라며 “얼마큼 외교력을 발휘하는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또 “범죄가 갈수록 국제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금보다 형사사법공조를 돈독히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