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사람 그리고 법률] 별이 빛나는 밤에

  • 등록 2019-10-12 오전 8:11:00

    수정 2019-10-12 오전 8:11:00

종합경제일간지 이데일리는 ‘Law & Life’ 후속으로 ‘삶, 사람 그리고 법 률’이란 주말 연재물을 신설합니다. 국내 주요 로펌 소속 변호사들이 유용한 법률 상식이나 일상 속에서 느낀 잔잔한 감동을 솔직 담백하게 독자들과 나눌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한정화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 “엄마, 큰일 났어요. 폭탄을 팔고 있어요.”

아이가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 집 앞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가 허겁지겁 집에 들어오며 다급하게 아내에게 외쳤다. 아내가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아이가 놀이터에서 노는데 근처 마트 앞에 배달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었고, 오토바이 배달박스 한편에는 마트 이름이, 다른 한편에는 `폭탄 세일`이라고 써져 있었다고 한다. 이걸 본 아이가 조심조심 오토바이로 다가가 박스 안을 들여다 보았으나 떨리는 마음에 폭탄이 있는지는 확인을 못하고 겁이 난 나머지 집으로 뛰어왔다는 것이다.

호기심 많던 아이가 초등학생 고학년이 되어 별자리에 관심을 가지자, 필자도 얼마 전에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라는 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만큼이나 읽기 힘든 책이었으나, 힘겹게 다 읽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이는 아빠로부터 우주에 관한 설명을 듣는 것보다는, 아빠와 함께 별에 관한 상상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그저 같이 별자리를 찾아보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일을 하다보면 이런 이치를 잊고 지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디 법조인의 경우만이 아니라 세상 이치가 다 마찬가지겠지만, 상대방의 이야기를 그저 묵묵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절반 이상이 해결되는 경우가 있다. 아무래도 법조인들은 일의 속성상 매사 자신이 판단하고 설명을 하려는 경향이 있기 마련이다. `먼저 잘 들어야지`하고 마음을 먹고서도 어느새 먼저 설명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다.

오래 전 일이다. 검사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지방의 어느 검찰청에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그곳에는 검찰, 법원, 변호사 사무실 직원들 모두가 다 아는 유명한 한 여인이 있었다. 초로의 남루한 행색의 그 여인은 매일 검찰청과 법원 주위를 맴돌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욕설과 알아듣기 힘든 말들을 외치곤 했다. 검찰청과 법원 창문 바로 밑에서 온종일 큰 소리로 욕설을 해대는 곤혹스러운 날들도 많았다. 정신이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고 불리며 직원들에게는 기피 1호의 요주의 인물이었다.

당시는 검찰청에 지금과 같은 출입통제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던 시절이었는데, 어느 날 검사실 밖 복도가 소란스러웠다. 검사를 만나겠다는 그 여인을 직원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느냐며 제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경찰이 검찰청, 법원 주변에서 매일 소란을 피우던 그 여인을 경범죄처벌법상 소란 행위로 즉결심판에 회부해 구류가 선고되자, 여인이 정식재판을 청구했는데 다짜고짜 자신의 재판을 담당하는 공판검사를 만나겠다고 검찰청으로 쳐들어온 것이었다. 그런데, 아뿔사. 필자가 바로 그 검사였다.

잠시 당황했지만 빨리 결정을 내려야했다. `내가 담당하는 사건의 피고인인 이상 이 여인이 나를 못 만날 이유가 없다. 얘기를 해보고 정말 정신이 이상한 것이라면 재판부에 설명을 하자`고 마음을 먹고, 검사실 소파에서 마주앉았다. 솔직히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하는 궁금증도 있었다.

결심은 곧 후회로 바뀌었다. 당시 격무로 잠잘 시간도 부족한 때였는데, 벌써 1시간째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인내심이 바닥날 무렵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오늘 원래 하려던 일은 포기한다. 대신 이 사람이 하고 싶은 얘기를 끝까지 한번 들어보자.`

끈기를 갖고 계속 듣고 있으니 어느 순간 순간 그 여인은 정상적인 사람처럼 말하곤 했다. 힘겹게 알아낸 사연은 대략 이랬다. 자신은 예전에 사업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사기를 당해 고소를 하게 되었고, 여러 고소 사건 와중에 자신이 무고죄로 감옥살이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너무 억울해 그 당시의 판사, 검사들의 이름을 부르며 욕을 하곤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반나절 얘기를 듣고 나니, 그 여인은 헤어질 무렵 온전해 보이는 얼굴로 “지금까지 자기 얘기를 끝까지 다 들어준 사람은 처음”이라며 고맙다고 연신 인사까지 하는 게 아닌가.

힘든 날이었지만 보람과 감동이 있었다. 그 여인은 그 후 일주일 간 검찰청 주변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아쉽게도 다시 예전 상태로 되돌아갔고 청사 입구에서 마주친 필자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순간이나마 그 여인이 마지막에 보여준 진심어린 표정은 쉽사리 잊을 수가 없다.

아이 덕분에 읽게 된 책 `코스모스`에서 칼 세이건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드넓은 우주 공간 속의 `창백한 푸른 점`(a pale blue dot)이라고 표현했다. 밤하늘의 별을 볼 때마다 문득문득 이 말이 생각나며 마음이 한없이 헛헛해지고 겸허해진다. 칼 세이건은 “우리의 기쁨과 슬픔, 숭상되는 수천의 종교, 이데올로기, 경제이론, 사냥꾼과 약탈자, 영웅과 겁쟁이,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민, 서로 사랑하는 남녀, 어머니와 아버지, 발명가와 개척자, 윤리 도덕의 교사들, 부패한 정치가들, 슈퍼스타, 초인적 지도자, 성자와 죄인 등 인류의 역사에서 그 모든 것의 종합이 여기에, 이 햇빛 속에 떠도는 먼지와 같은 작은 천체에 살았던 것이다”고 얘기하고 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남겨둔 채 인류를 위해 먼 우주로 떠나야 하는 남자 주인공 쿠퍼는 떠나지 말라며 우는 딸 머피를 달래며 이렇게 말한다. “네 엄마가 했던 말이 있는데 그땐 잘 이해를 못했어. 엄마가 말하길, 부모는 아이들의 추억이 되기 위해 사는 거야. 지금은 무슨 의미로 말한 건지 알 것 같아. 너도 부모가 되고 나면 훗날 네 아이들의 추억이 될 거야.”

우주 한 구석의 어느 창백한 푸른 점 위의 우리는 훗날 누구에게 어떤 추억과 기억으로 남을 수 있을까. 가을인가 보다. 필자 같은 아재가 밤하늘의 별을 이야기하다니.

☞한정화(韓廷和)변호사는

△사법연수원 29기 △대검찰청 검찰연구관 △서울중앙지검 부부장 △법무부 감찰담당관실(부장) △창원지검 밀양지청장 △대검찰청 범죄정보2담당관 △수원지검 공안부장 △법무법인(유) 광장(Lee & 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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