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장순원 기자] 투기꾼은 돈 냄새에 민감하다. 요즘 이들이 몰리는 곳이 국제 곡물시장이다. 투기자금이 국제 곡물시장으로 움직이면서 선물시장에서 옥수수나 밀 콩 같은 주요 곡물의 매수포지션이 급격히 늘고 있다. 미국이나 러시아, 우크라이나 같은 세계 주요 곡물 생산국에서 극심한 가뭄이 발생해 밀ㆍ옥수수ㆍ콩 같은 국제 곡물 가격이 치솟은 상황이다. 투기자금까지 가세하면서 기상이변이 촉발한 국제 애그플레이션 파고가 한층 더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국제금융센터도 이번 애그플레이션이 2007∼2008년, 2010∼2011년 당시의 곡물 파동보다 더 심각할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주요 곡물 수입 의존도가 높아, 이런 상황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밀과 옥수수의 자급도는 각각 0.8%(2010년 기준)에 불과하고, 콩은 8.7%다. 밀가루와 옥수수는 빵, 국수, 맥주 등 식탁물가와 외식물가에도 영향을 주는 대표적인 곡물이다. 또 사료가격 인상으로 이어지면 돼지고기, 쇠고기 가격으로 번지면 전체 밥상물가가 들썩일 가능성이 크다.
당장 정부는 비상이 걸렸다. 국내 농산물 작황이 들쭉날쭉 한 모습을 보이는 상황에서 국제 곡물가마저 치솟는 내우외환이 겹쳤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업 팔 비틀기라는 비판까지 감내하며 간신히 물가를 안정시켰지만, 이런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마저 커지고 있다. 대선 같은 민감한 정치일정을 앞두고 서민 생활과 직결된 물가가 요동치면 아무래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정부는 우선 충격파가 한꺼번에 터지지 않도록 가공식품이나 주류 가격을 미리 올리면서, 추석을 앞두고 배추 같은 채소류 값 안정에 전력을 집중하고 있다. 지금 선제대응을 하지 않으면 추석과 김장철 높아진 물가가 애그플레이션 영향과 맞물리면서 연말께 물가 대란으로 번질 수 있다는 점에서다. 사상 최고 수준으로 오른 국제 곡물가는 4~7개월 후 국내에 영향을 준다.
재정부는 “당장은 올 생산 감소로 가격이 오른 양파, 마늘에 대해서 계약 재배 물량을 늘려 내년도 생산 시기까지 유통물량을 확보할 예정”이라며 “날씨에 민감한 배추, 무 등 김장 재료에 대해서도 공급량을 충분히 확보하겠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돈(농산물가격 안정기금)을 풀어 농산물 공급을 늘리기로 했다. 채소는 계약재배 물량을 늘리고 콩, 팥 등은 만약에 대비해 미리 비축해 놓겠다는 복안이다. 또 곡물가격 폭등세가 이어지면 밀과 콩을 무관세로 들여오겠다는 방침이다. 공공비축 대상 작물을 쌀에서 밀, 콩, 옥수수까지 넓히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단기 대책으로는 상시화한 애그플레이션을 막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식량 자급률을 높이고, 해외 식량기지 건설과 수입 다변화, 농산물 유통구조 개선 등 다양한 대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상시적인 물가불안이 구조화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장순원 기자 crew@edaily.co.kr
▲애그플레이션(Agflation)
농업(Agriculture)과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 곡물 가격 급등이 식료품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고, 그 영향이 다시 전반적인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