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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제목을 단 기사는 신문 경제면을 단골로 채워왔다. 그간 증권사 조직 문화가 얼마큼 남성 중심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일 것이다. `여자는 재수가 없어 주가를 떨어뜨린다`는 비합리가 `증권맨` 사이에서 통하던 시절도 있었다.
비합리에 합리적인 도전장을 낸 선두주자로 김광순씨가 꼽힌다. 1984년 쌍용투자증권에 입사한 김씨는 `여성 최초 투자상담원`이다. “고객이 남성 상담원을 원할 때 당혹스러웠다”는 김씨 인터뷰(매경 1986년 11월24일 치)에서 `증권맨`이 아닌 자의 고뇌가 읽힌다. 당시는 증권가 여성 저변이 척박한 때였다. `동서증권 이복래씨가 차장으로 승진해서 2만여 증권사 직원 가운데 첫 여성 중견간부가 탄생`(동아일보 1991년 3월8일 치)한 것이 뉴스거리였다.
전기를 맞은 것은 1993년 4월 취업규칙 개정 물결이 일면서다. 당시 노동부는 1988년 제정한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라 `동일학력 간 임금격차를 그해 5월까지 철폐하라`는 등 취업규칙을 손보라고 증권사를 지도했다. 꼼수도 빈발했지만 큰 틀에서 개선이 이뤄졌다. 차츰 `증권맨`이 아닌 자의 숨통도 트이기 시작했다. 결혼·임신·출산한 여성은 퇴직해야 하는 `결혼퇴직제`가 취업규칙에서 사라진 것도 이 무렵으로 알려졌다. “증시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1986년 이후 많은 여직원이 입사했고, 결혼퇴직제 폐지로 장기근속자가 늘어나 증권사도 이들을 활용할 방안을 찾아야 했다”는 증권업계 관계자 시선(동아일보 1994년 4월4일 치)은 증권가에서 여풍이 거세진 계기를 분석한다. 앞서 김광순씨가 다시 신문 지면에 등장한 것도 이때 이후다. 1995년 12월 쌍용투자증권 경기 분당지점장에 오르면서다. 김씨를 두고 ‘증권업계 첫 여성 지점장이 탄생해 화제’(매경 1995년 12월19일 치)라고 업계는 주목했다.
1996년은 여성 약진이 두드러진 해였다. 그해 1월 최초 여성 채권 브로커가 탄생한 게 테이프를 끊었다. 주인공은 ‘동서증권 채권부 이주리씨’다. ‘채권 브로커를 하려면 고도의 금융지식이 필요해서, 동서증권 채권부원 9명 가운데 남성이 8명’(매경 1996년 1월19일 치)이었다. 여기서 한 자리를 이씨가 꿰찬 것이다. 같은 달 증권거래소에서 여성 시장대리인이 2명 나왔다. ‘1956년 증권거래소가 문을 연 지 40년 만에 처음’(한겨레 1996년 1월29일 치)이었다. 삼성증권 시장부 최옥정씨와 ING베어링증권 서울지점 서연준씨 얘기다. 그 무렵 증권거래소에서 최초의 여성 대리가 탄생(매경 1996년 2월5일 치)한 것도 관심이었다. 그해 5월 증시에 선물시장이 생겼고, 삼성증권 선물매매팀 길정하씨가 국내 1호 여성 선물 딜러로 이름을 올렸다.
지금이라고 별반 달라진 게 없다. 박 대표 취임은 여전히 큰 뉴스다. 업계와 언론은 `여성 첫 증권사 CEO`라는 수식으로 박 대표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런 박 대표는 취임하고 이데일리를 포함한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여성 임원 탄생이 더는 화제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증권가에서 여성 저변이 더 커지기를 바라는 취지에서였다. 그런데 그 발언 자체가 다시 뉴스가 됐으니, 모순이라면 모순이다. 그의 외침은 언제쯤 공허한 울림을 멈출까. (사족이지만 기자는 남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