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의장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카메라를 잡았다. 공부하기 바쁜 의대생이 되어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오히려 동아리 사진예술연구회와 대학 학보사 사진기자로 활동했다. 당대 고수였던 정인성·최민식 선생에게 사진을 배웠다. 부산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설경(雪景) 사진을 찍겠다며 상경까지 할 만큼 열정이 넘쳤다. 국제신문 주최 사진전과 대구매일신문 공모전에 응시해 입상했던 것도 그 때다.
정 의장은 부산대 의과대학을 졸업하던 1972년 10월에 광복동 수다방에서 첫 개인 사진전을 열었다. 졸업 후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거치면서 그의 손에서는 한 동안 카메라를 볼 수 없었다. 대신 신경외과 의사로 뇌혈관을 내시경 카메라로 지겹게 찍었다. 다시 정 의장 손에 카메라가 들려졌고, 틈틈이 지역구인 부산 중동구 산복도로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했다.
국회의원과 국회 부의장 시절에는 해외출장을 갈 때 마다 새벽에 일어나 2~3시간씩 도시를 걸으며 사진을 찍었다. 주로 찾은 곳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전통시장이었다.
정 의장은 “(전시 작품은) 다 출장 가서 찍었다. 사진은 새벽하고 저녁에 잘 나온다. 5시쯤 일어나 도시를 2~3시간 걸으면서 찍었다. 풍경보다는 사람 표정을 잘 찍는다. 인간이라는 사진집을 낸 최민식 선생한테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인물 사진에는 서민들이 진솔한 모습이 많이 담겨있고 풍경 사진에는 희망을 나타내는 하늘이 많이 나온다. 사진전 이름처럼 따뜻한 시선 그 자체다. 정 의장은 “사진 속 사람, 사진 속 자연은 모두 살아있고 우리에게 다양한 빛깔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래서 사진을 찍는 순간보다 대상과 교감하는 시간을 더 소중하게 여기며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곤 한다”고 했다.
사진전 수익금을 국제구호개발 시민단체인 한국월드비전에 전액 기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남다른 사연이 있다. 부산 김원묵기념 봉생병원장을 지낸 정 의장은 고 김원묵 박사의 사위다. 김 박사는 1949년 봉생병원의 시초인 봉생의원을 서울 종로에 연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신경외과 의사로 변신해 1956년에 부산 봉생신경외과의원을 개원했다. 67년엔 봉생신경외과병원으로, 85년에는 종합병원으로 키워냈다. 봉생(奉生)은 생명을 존중하고 받든다는 의미로,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김 박사의 할아버지가 1900년초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현재 평양 만경대구역)에 개설한 봉생의원까지 이어진다. 110년이 넘는 역사다.
정 의장은 “장인 어른이 평양 의과대학을 나온 후 김일성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다 1948년 러시아 병사의 간호사 폭행을 막아 나선 일이 있었는데, 그 일로 화를 입을까 남한으로 넘어왔다”며 “자식으로서 장인 어른의 유업을 계승하기 위해 평양에 봉생병원 분원을 내는 것이 꿈이자 과제”라고 강조했다.
남북협력의료재단은 평양 봉생병원 분원을 포함해 북한의 중소도시 30곳에 30병상 규모의 병원을 설립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