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서울의 '특화거리'가보셨나요

세계음식거리-수제화타운 등 각양각색
자치구마다 무분별하게 추진 중복되기도
전문가들 "거리 조성, 질로 승부해야"
  • 등록 2012-06-05 오전 8:42:55

    수정 2012-06-05 오전 9:51:16

이데일리신문 | 이 기사는 이데일리신문 2012년 06월 05일자 20면에 게재됐습니다.
[이데일리 경계영 기자] 1. 대학생 김정민(24)씨는 색다른 음식을 먹고 싶을 때면 이태원을 찾는다. 이태원 ‘세계음식거리’에서는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이탈리아 음식점은 물론 러시아, 그리스, 인도, 터키 등 여러 국가의 가지각색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식사 후 이태원거리의 독특한 옷을 파는 가게와 고가구를 파는 상점을 구경하는 재미는 덤이다.

2. 초등학생 자녀를 둔 엄마 박지은(36)씨는 아이 학교 준비물을 살 때면 창신동 문구거리에 간다. 일반 문구점보다 20~30% 정도 싸게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매단위로만 팔아 낱개로 살 수 없는 학용품은 다른 학부모와 함께 구매해 나누기도 한다.


틀에 박힌 듯 똑같은 거리는 식상하다. 다채로운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즐길 수 있는 거리가 인기다. 서울시내 각 자치구도 특화거리를 조성하고 있다. 지역의 특성을 살린 특화거리로 유동인구도 늘리고 상권도 활성화하려는 전략이다. 각양각색의 특화거리 특징과 문제점 개선을 위한 방안들을 알아봤다.<편집자>

수제화가 백화점의 반값 지하철 2호선 성수역에서 1번 출구로 나오면 ‘서울 성수수제화타운(SSST)’이 눈에 들어온다. 성동구 성수동에 있는 수제화 공장들이 공동으로 수제화를 판매하는 매장이다. 백화점보다 최대 50% 싸게 수제화를 살 수 있다. 길 건너 4번 출구로 나와 안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수제화거리도 있다. 수제화를 팔기도 하지만 주로 구두 재료 가게들이 모여 있다.   
▲ 성수동 수제화거리. 수제화 공동판매장인 성수수제화타운(SSST)과 그 길 건너에는 주로 구두 원·부자재를 파는 가게들이 있다. 사진=경계영 기자


  1980년대 성수동은 국내에서 생산되는 수제화 90%를 책임졌다. 그러나 외환위기와 중국산 구두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이에 성동구가 나서 수제화타운을 만들고 제화기능공을 양성하기 위한 구두 제조 교육장도 만드는 등 수제화산업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가구거리로 유명한 곳도 있다. 광진구 중곡동에 있는 가구거리와 서대문구 북아현동의 가구거리, 용산구 이태원의 앤틱가구거리가 그곳이다. 상시 할인행사를 펼치거나 여러 가구를 한 번에 둘러볼 수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강남구 도곡동에는 골프·등산 관련 업체 24개가 몰려 있는 골프로데오거리가 있다. 강남구는 이 거리를 골프 산업의 메카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대규모 할인판매, 프로골퍼의 레슨행사 개최 등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다.  
▲강동구 천호동에 있는 문구·완구거리. (강동구 제공)
  문구거리의 원조는 종로구 창신동이다. 도·소매를 겸한 문구점들이 밀집해 개학 때가 되면 아이 손을 잡은 학부모들이 많이 찾는다. 강동구 천호동 문구거리도 유명하다. 창신동 문구거리에서 장사하던 문구점이 1980년대 많이 옮겨오면서 거리가 시작됐다. 강동구는 천호동 문구거리를 특화거리로 지정하고 사람들이 더 많이 찾을 수 있도록 간판 정비와 주차장 마련 등 사업을 진행했다.

영화 ‘아리랑’을 촬영한 성북구 돈암동과 정릉동 사이의 고개와 동소문동 일대는 ‘아리랑 영화의 거리’로 지정됐다. 춘사 나운규와 그의 영화 ‘아리랑’을 기념하는 거리다. 구에서는 매년 5월에 영화 주인공들의 패션을 재현한 가장 행렬 방식의 영화 패션쇼와 영화음악제 등 아리랑 축제를 개최한다.

▲성북구에 있는 아리랑 영화의 거리. 영화 '아리랑'을 기념해 아리랑 씨네센터와 나운규 소공원 등을 조성했다. (성북구 제공)


먹을거리로 유명한 거리도 있다. 바로 관악구 신림동의 순대타운. 1970년대 신림동 재래시장에서 시작한 순대타운은 1992년 ‘원조민속순대타운’, ‘양지순대타운’ 등 주변 건물로 옮겨가 지금의 순대타운이 만들어졌다. 마포구 용강동의 마포갈비·주물럭거리도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1950년대 마포나루 고깃집에서 양념에 재운 돼지·쇠고기를 팔았다는 데서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학생들이 몰리는 학원가를 거리로 특화한 구도 있다. 2000년쯤 노원구 중계동에 학원이 하나둘 들어서던 때 명문대 합격자가 늘면서 인근 학원가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중계동 은행사거리 학원가에 중랑구나 의정부 등 인근 지역 학생까지 몰리면서 지금은 200곳이 넘는 학원이 있다.

동작구는 각종 고시학원이 몰려있는 노량진 학원가를 특화거리로 조성한다. 총괄 기획자로 정진우 서울시립대학교 교수를 임명해 거리 디자인을 개선하고 무료 스터디 공간 제공 등 인프라를 구축할 계획이다.

강북구는 국립4·19민주묘지와 애국선열의 묘역이 있다. 이에 순국선열의 얼을 기리고 역사적 사건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4·19거리를 운영한다. 4.19길(현 한천로, 서울 거리 르네상스)에 이시영, 손병희 등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소개하는 판을 거리에 설치했다.

◇ 너도나도 “로데오거리” 서울시내에는 10곳이 넘는 로데오거리가 있다. 강남구 압구정과 송파구 문정동, 강남구 도곡동, 강동구 천호동, 광진구 건국대, 구로구 구로동, 도봉구 창동, 양천구 목동, 은평구 연신내 등에 로데오거리란 이름이 붙었다. 패션거리로 유명한 미국 비버리힐즈의 로데오드라이브에서 따와 의류 등을 파는 거리를 로데오거리라 부르는 것이다.

한 자치구 관계자는 “로데오거리라 이름 붙이면 젊은 층이 관심 갖고 많이 모이고 기억하기도 쉽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의류나 신발 등 패션 관련 상업 지구를 모두 ‘로데오거리’라 이름 붙여 특색이 드러나지 않는데 이를 특화된 거리라 보기는 어렵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다.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 특화거리도 있다. 서울시는 2년 전 종로1~5가에 있는 노점상 647곳을 주변 이면도로로 강제로 옮겼다. 종로를 ‘걷고 싶은 거리’로 만들기 위해서다. 이주를 거부하는 노점상의 반발이 거세자 시는 노점특화거리를 조성해 편의시설을 설치하고 홍보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종로의 노점특화거리를 홍보하는 광고. 사진=경계영 기자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노점상의 불만이 폭주했다. 대다수의 노점상은 유동인구가 없는 이면도로로 가게를 옮긴 이후 손님이 줄어 생계가 어려워졌다. 이에 구는 이주가 시작된 지 2년이 지난 4월, 서울시 정책을 홍보하는 가로판매대 뒤편 광고면에 노점특화거리를 안내하는 포스터를 붙였다. 노점상 이주 당시 돌렸던 홍보 전단지 이후 2년 만에 내놓은 홍보 방안이었다.

누구나 알 만큼 거리가 유명해지고 찾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유명세가 오히려 독이 되는 거리도 있다. 홍익대학교 앞은 1000곳이 넘는 출판사가 밀집한 곳은 도서출판의 거리와, 문화예술·공연장 등이 많은 곳은 예술의 거리 등이 있다. 그러나 유동인구가 늘면서 임대료가 자연스레 올랐다. 인디문화를 형성하던 예술가들은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홍대 앞 거리를 떠나고 있다.

홍대를 이을 제2 예술의 거리로 떠오르는 지역은 문래동 예술촌 거리다. 임대료가 비교적 저렴해 홍대, 대학로 등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이 많이 이주했다. 영등포구는 2007년부터 지원에 나서면서 스튜디오, 박스시어터 등으로 구성된 ‘문래예술공장’을 세우고 축제, 아트페스티벌 등 행사도 지원하고 있다.  
▲문래동의 예술 창작촌. 문래아트페스티벌, 예술축제 등이 열린다. (영등포구 제공)
예산 문제로 조성이 중단된 특화거리도 있다. 영화로 유명한 충무로에는 원래 ‘예술인의 거리’가 조성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충무영화제가 예산 문제로 개최가 중단되면서 거리 조성도 무산됐다.

◇ 진짜 ‘특화거리’ 만들려면… 김상철 진보신당 서울시당 정책기획국장은 “특화거리를 조성하겠다며 많은 자치구들이 사업을 벌였지만 가로정비사업과 별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다. 지역을 특화하겠다면서 거리를 조성하면서도 제대로 지역색을 살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김 국장은 “인사동길이나 강남역 거리 등을 보면 지역 자원을 살리기보다 고급 자재로 도배해놓아 이동의 편리성과 상관없는 장식물로 치장하기에 급급한 모습”이라며 “비용이 낭비되기 십상이다”고 말했다.

실제 몇몇 자치구가 조성한 특화거리에는 공통점이 있다. 분수, 무대를 설치하거나 가로등·보도블럭 등을 개선한다. 특화거리를 상징하는 조형물을 설치하는 것도 빠지지 않는다. 이런 정비사업에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 않다. 최소 1억 원에서 대대적으로 거리를 개선할 때는 40억 원 이상 예산이 집행된다.

▲정동길. 사진=경계영 기자
김 국장은 정동길을 그나마 잘 된 사례로 꼽았다. 그는 “앉아서 쉴 수 있는 곳이 적절히 배치됐고 다양한 형태를 갖춰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벗어났다”며 “기존의 정동길 원형을 잘 유지한 채 거리가 조성됐다”고 설명했다.

민현석 서울시정개발연구원 도시공간연구실 연구위원은 “그동안 특화거리 조성을 위한 가로정비 사업이 물리적 수준이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가로를 정비한다고 상권이 활성화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거리 환경을 개선하는 것과 별개로 상인이 노력해야 상권이 살아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정 주도로 이뤄지는 거리 조성 사업에 상인을 비롯해 주민 의견을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 연구위원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강조하는 주민의 적극적인 시정 참여는 거리 조성에도 해당된다”며 “특성화하려는 거리 조성 사업에 주민이 참여해 그 지역만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가치를 만들어내 질적으로 성장한, 특색 있는 거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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