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총생산(GDP) 대비 70%를 수입할 정도의 높은 대외의존도 속에서 놀랄 만한 물가안정을 이루는 나라, 바로 네덜란드다.
지난 5월 네덜란드의 물가상승률은 2.3%로 OECD 국가 중 일본(1.8%)·캐나다(2.2%)에 이어 세 번째로 낮았다.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하락)으로 고통 받은 일본과, 자원부국 캐나다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세계 최강의 물가관리 능력이다.
네덜란드의 비법은 2002년에 봤던 히딩크 감독의 리더십 그대로다. 탄탄한 기초체력을 바탕으로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도, 합리성에 기초해 팀워크를 잃지 않는다. 네덜란드 경쟁력의 비결은 무엇일까.
세계적인 곡물·유가 상승에서 네덜란드도 자유롭지는 못하다. 지난 5월 네덜란드의 식료품값은 6.3%(1년 전 대비), 휘발유 7.2%, 경유 31.9%나 올랐다.
안정된 집세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국민의 53%가 임대주택에 산다. 정부의 안정적인 주택공급으로 2000년대 지구촌을 덮친 부동산 버블에서 네덜란드는 자유롭다. 네덜란드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2007년 7월~2008년 7월까지 계약된 임대주택 중 집세가 가장 많이 오른 곳의 상승률이 1.4%에 불과할 정도다.
2003년부터 시작된 수퍼마켓의 치열한 경쟁도 네덜란드 물가를 잡는 비결이다. 네덜란드의 수퍼마켓은 대규모 유통기업들이 운영한다. 2003~2005년 사이에 도매가격은 5% 올랐는데, 오히려 소매가격은 5%가 떨어졌다. 주변 국가들에 비해 식료품을 9.4%나 싸게 살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네덜란드 통계청이 최근 물가안정 이유에 대해 "수퍼마켓 때문에 물가 상승속도가 다른 유럽국가들보다 낮다"고 밝힐 정도다.
물론 유로화 강세도 수입물가를 잡는 데 한몫 했다. 같은 기간 신차(新車) 값은 1.1%, 중고차 값은 3.7% 떨어졌고, 휴대전화와 인터넷 사용료를 포함한 통신비는 5.1%나 떨어졌다. 특히 통신비는 EU지역 전체적으로 무한 경쟁이 펼쳐지면서 2004년 이후 줄기차게 떨어지고 있다. 책값도 1.2% 떨어졌고 의료기기 가격도 0.5% 하락했다.
◆넘치는 일자리에도 규제개혁 가속
물가 관리만 1등이 아니다. 네덜란드는 1인당 국민소득 5만 달러의 고소득 국가지만, 작년 경제성장률이 3.5%에 달할 정도로 성장 엔진 역시 생생하게 살아 있다. 실업률은 한국과 비슷한 3.0%(IMF 기준)에 불과하다. IMF가 "일자리 부족으로 인한 임금상승이 물가의 위협요소"라고 진단할 정도다.
로열더치셸 같은 네덜란드의 석유화학 기업들은 고유가 혜택을 톡톡히 보고 있다. 수많은 유전을 확보하고 있고, 고부가가치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하면서 기름 한 방울 나지 않지만 중동 산유국에 버금가는 혜택을 입고 있는 것이다.
코트라에 따르면 올 1~4월 네덜란드의 제조업 매출은 1년 전 대비 10% 이상 늘어났고, 투자는 작년보다 11%나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농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투자도 발 빠르다. 고유가로 네덜란드의 대표산업인 온실 화훼산업이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되자 올 연초 네덜란드 정부는 축구장 150개를 합한 정도의 거대한 온실 건설을 발표했다. 올 3분기에 완공돼 내년 3월이면 토마토·피망 등이 첫 생산될 정도로 속전속결이다.
정부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2003년 네덜란드는 세계 최초로 정부의 규제비용을 계량화했다. 분석 결과 규제로 인한 행정부담이 무려 163억 유로(26조원)에 달했고, 재무부 등 4개 부처가 행정부담의 75%를 점유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즉각 규제완화에 나섰고, 2003년부터 2006년까지 3년간 5조원에 이르는 기업부담을 줄여줬다. 한국은행 해외조사실 박진호 과장은 "네덜란드는 위기가 닥치면 노·사·정 위원회를 열어 똘똘 뭉치는 등 치열하게 경쟁하면서도 팀워크를 놓치지 않는다"며 "자유무역의 혜택을 가장 잘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