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번역, 솥뚜껑 보고 놀란 격…“공진화 고민할 때”

AI문학번역의 미래는? 공론의 장 첫발
詩 문학·영화 대사 등 AI번역 해보니
김칫국 마시다→드링킹 김치수프 직역
정확도 40% 미만, 복합적 오류 동반
고칠 곳 수두룩…“시간 낭비” 지적도
‘공진화 모색’ 범사회적 고민 필요
  • 등록 2023-05-31 오전 7:10:00

    수정 2023-05-31 오전 11:10:41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솥뚜껑 보고 놀란 격이다”. 한국문학번역원이 최근 연 심포지엄에서 정과리 연세대 교수가 인공지능(AI)의 현 번역 수준에 대해 평가한 말이다. 이날 심포지엄의 기획위원장을 맡은 정 교수는 “현 수준의 AI번역기는 평범한 번역의 최대치까지 갈 수는 있어도 창조적 수준으로 넘어가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궁극적으로 번역의 완성은 인간 번역가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진단은 실제 문학 작품을 놓고 인간번역과 기계번역(챗GPT·파파고 등)을 모의 비교 실험한 결과에 따른 것이다. 이날 심포지엄 참여 전문가들은 문학작품의 기계번역 정확도는 30~40%가 채 안 되고, 문학 텍스트의 생성형 AI 챗GPT 번역 수준은 수정·보완해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아 “시간 낭비”라는 분석을 내놨다.

번역원은 지난 26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AI 번역 현황과 문학 번역의 미래’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고, AI 고도화 시대의 문학번역과 AI기술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했다. AI와 문학(예술)을 다룬 대규모 공론의 장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픽=이데일리 문승용 기자
시구, 대사 등 문학작품 AI번역 해보니…

올해 초 한국문학번역원은 예상치 못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번역원이 주관한 ‘한국문학번역상’(웹툰 부문) 지난해 신인상 수상자가 AI번역기 ‘파파고’를 활용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다. 번역원은 공모 요건을 수정하고 맹점 보완에 나섰지만 이 사태는 출판계를 넘어 우리 사회에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과연 AI는 인간을 대체할 것인가.

실제로 AI기술의 고도화는 우리 일상을 파고들고 있다. 2012년 중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모옌은 지난 16일 동료 작가인 위화에게 문학상을 시상하면서 챗GPT를 사용해 축하글을 썼다고 고백해 문단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30년 경력의 미국 베테랑 변호사는 법원에 내는 서류준비 과정에서 챗GPT에 의존했다가 법원 청문회에 회부될 처지에 놓였다. 챗GPT를 통해 인용한 판례가 실제 존재하지 않는 ‘거짓’임이 밝혀지면서다.

곽효환 한국문학번역원 원장은 “AI의 진화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다는 데 다들 당황하고 있다”며 “AI가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이 된 상황에서 자극적이고 과장된 추측, 과잉된 전망에 휩쓸릴 것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이를 토대로 한 미래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논의가 AI 디지털 시대에 문학 번역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조망하는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지난 26일 한국문학번역원 주최로 ‘AI번역 현황과 문학번역의 미래’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이 열린 가운데 곽효환 번역원장은 “아직 기계번역이 창의적 결과물을 내지는 못하지만 AI가 사유 능력까지 갖추게 됐을 때의 공진화에 대한 담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진은 지난 15일 사전 간담회 모습. 왼쪽부터 한승희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교수, 곽효환 원장, 정과리 연세대 국어국문학 교수, 김선희 서울대 불어교육과 교수, 곽현주 번역출판교류본부장(사진=연합뉴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AI번역과 인간 번역에 대한 비교 연구 사례가 여러 건 공개됐다. 전혜진 중앙대 국제대학원 전문통번역학과 교수는 조앤 K.롤링의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대상으로 인간번역과 기계번역을 비교 분석했다.

전 교수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의 구글 번역을 분석해 본 결과 번역 정확도는 30~40% 미만 수준에 그쳤다”며 “번역 오류가 어휘, 문법, 활용론, 문체론, 문화적인 층위에서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지적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간의 관계, 성격, 상황 등을 이해하지 못해 호칭과 어미 처리에 취약한 수준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마승혜 동국대 영어영문학부 교수는 영화 ‘기생충’의 대사 번역을 사례로 들었다. 마 교수에 따르면 챗GPT는 극 중 인물 ‘기우’의 대사 중 ‘김칫국 마시다’라는 관용적 표현을 전후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We’re drinking kimchi soup”로 직역해 ‘섣부르게 생각한다’는 원래의 의미를 전달하지 못했다.

김이듬의 시 ‘사과 없어요’의 시구 번역도 비슷한 오류를 범했다고 마 교수는 전했다. 시에 등장하는 “손님이 삼선짜장면이라고 말했잖아요”라는 구절에서 ‘삼성짜장면’을 인간 번역가는 ‘Seafood’로, 챗GPT는 ‘samseon jjajangmyeon’으로 단순히 옮겨 썼다.

정 교수가 제시한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에 나오는 유명 시구 “Le ven se leve!…il faut tenter de vivre!”를 번역 비교한 결과도 흥미롭다. 정 교수는 “AI번역들은 아주 실망스러웠다”며 “존칭으로 번역한 건 발레리 시구에 대한 인문학적 정보를 전혀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재 AI번역은 거의 축자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분석했다.

고도의 언어수행, 맥락, 상황이해 등을 비롯해 감성을 요구하는 문학번역의 영역에서 기계번역이 인간번역에 위협이나 도전이 될 수 없다는 게 참석자들의 대체적 의견이다.
서울의 한 대형서점에서 인공지능 챗GPT가 쓴 자기계발서 ‘삶의 목적을 찾는 45가지 방법’을 방문객이 살펴보고 있다. 이 책은 챗GPT가 집필하고, 번역은 AI 파파고가, 인간은 기획, 인쇄, 출판을 담당했다(사진=뉴시스).
공진화의 길…범사회적 고민·담론 필요

‘공진화’(共進化, 함께 진화)가 이번 심포지엄의 열쇳말이다. AI 기술 발달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인 만큼, 문학 번역과 번역 교육 분야에서도 AI와의 협업 가능성을 검토하고, 그 수용 범위와 윤리적 문제 등에 대한 범사회적 고민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제언이다. 생성AI번역의 현재 수준은 인간 번역을 따라오지 못하는 수준이지만, 기술 발전이 계속 이뤄지면 여러 방식으로 다양한 분야의 번역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번역서비스 회사 플리토의 이정수 대표는 “인공지능이 (번역을) 100%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AI는 다양한 분야의 번역에서 ‘효율’을 높여주는 역할을 통해 전문 번역가들이 고품질 번역을 완성하는데 지원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창수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한영과 교수는 “사람이 공을 들여 번역하는 것이 순수 재료를 골라 맛을 내는 요리사의 일이라면, 기계번역은 패스트푸드에 가깝다”고 표현했다. 이 교수는 “기계번역은 언어장벽에 놓인 인간의 문명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라며 “마냥 제재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관계로 발전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정과리 교수는 “AI는 인간의 명령을 받아서 일하며 자율권이 주어지지도 책임이 요구되지도 않는다. AI쪽의 자율권과 책임은 AI 제작사에 귀속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면서 AI활용으로 생기는 책임 문제 등의 복잡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미리 단정 짓는 일은 위험하다. 지금은 ‘의문부호’를 달고, 인간과 AI의 공진화 길을 모색해야 한다”며 “그것이 현재 우리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지난 26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한국문학번역원 주최로 열린 심포지엄의 종합토론 모습. 사진 왼쪽부터 신중휘 네이버클라우드 파파고 이사, 마승혜 동국대 영어통번역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정과리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창수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한영과 교수(사진=한국문학번역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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