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신상건 기자]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들의 퇴직연금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확정급여형(DB)과 확정기여형(DC)으로 양분됐던 퇴직연금 시장에 하이브리드형 퇴직연금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선진국들의 퇴직연금 운용 형태를 살펴보면 안정성을 중요시한 DB형에서 수익률을 높일 수 있는 DC형으로 점차 이동하는 추세다. 선진국 중에서 퇴직연금 역사가 가장 오래된 미국의 경우 자본시장의 활성화로 투자 수익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1980년대를 정점으로 DB형을 대신해 DC형이 대중화됐다.
미국의 퇴직연금 발자취는 18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퇴직연금이 140여 년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만큼 유럽과 일본 등 다른 선진국들의 모델이 되고 있다. 영국은 1970년대, 일본은 2000년대부터 DC형이 퇴직연금의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DC형은 DB형과 비교해 높은 수익률을 얻을 수 있지만 개인이 투자 책임을 모두 져야 하는 부담이 있다. DB형도 안전하지만은 않다. 임금상승률이 적립금 운용수익률을 뛰어넘는 추세가 이어질 경우 회사의 연금 시스템 자체가 망가질 수 있다.
보험연구원 관계자는 “기업 입장에서는 근로자와 운용 위험을 일정부분 공유하고 근로자 입장에서도 퇴직할 때 기업이 일정 연금 지급을 보장하기 때문에 하이브리드형 퇴직연금에 대한 수요가 전 세계적으로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KB금융연구소에 따르면 미국의 CB형 퇴직연금의 비중은 2001년 3%에서 2014년 28%로 급증했다.
연금소득에서 퇴직연금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네덜란드는 집단형 DC(Collectiv DC)형 퇴직연금 제도를 운용 중이다. 이 퇴직연금은 법적으로는 DB, 회계상으로는 DC로 인식되는 혼합형이다. 이 연금은 적립금 운용 성과가 좋으면 퇴직급여를 많이 주고 나쁘면 적게 준다. 적립금 운용 위험을 근로자가 부담하는 면에서 DC형과 비슷하지만 가입자 개인 계정이 없고 기업이 전체 집단의 연금을 모아 하나로 운용한다는 면에서 DB형과 같다.
이에 따라 근로자가 자산운용 위험을 일방적으로 부담하는 현상을 완화하고 개인 단위의 자산운용으로 인한 운용효율 저하를 방지해 국민의 노후소득을 보장하자는 취지 아래 DA형을 도입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일본은 기업이 퇴직연금을 실시하기 쉬운 환경을 만들자는 목표 아래 하이브리드형 퇴직연금으로 2002년 지수연동형 Cash Balance , 2014년 실적연동형 Cash Balance 퇴직연금을 각각 도입했다. 지난해 도입한 ‘리스크분담형DB12’의 특징은 노사 합의를 통해 사전에 정해진 위험 대응 부금을 적립하고 이를 기업이 일괄적으로 운영한다. KB금융연구소 관계자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구체적인 하이브리드형 퇴직연금 도입 논의가 없는 상태”라며 “각국의 기존 퇴직연금 운영 상황을 주의깊게 살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