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례로 지난 1991년 우리나라가 처음 국제해사기구(IMO)에 가입할 때 외무부와 해양항만청은 IMO 가입을 위해 발벗고 나서줄 인물로 조 회장을 지목했다.
당시 마침 말타 공화국 명예총영사로 활동했던 조 회장은 각국 대표들을 찾아 다니며 협력을 요청했고, 결국 160여 개국 투표로 치러지는 이사국 선임을 이뤄냈다. 그리고 1994년 우리나라의 IMO 이사국 연임에도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세계 해운업계가 주목한 `한국 해운의 별`
1954년 인천에서 태어난 조 회장은 세계 해운업계가 주목하는 해운인이었다. 1985년 한진해운 상무를 시작으로 한진해운과 인연을 맺은 조 회장은 1994년 대표이사 사장을 거쳐 2003년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했으며, 국내외 해운산업 발전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한진해운이 세계적인 선사로 성장하는 발판을 닦았다.
1993년부터는 세계 컨테이너선사 최고경영자 모임인 `박스클럽` 멤버로 활동했으며 1995~1997년에는 북미항로에 취항 중인 선사들의 협의체 `북미항로 안정화 협정`(TSA)의 제4대 의장으로 활동, 선사 간 활발한 의견 조정을 통해 세계 해운시장의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1993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세계 최대의 민간해사기구인 `발틱 국제 해사기구 협의회`(BIMCO)의 이사에 선임됐고, 1999년에는 이 기구의 부회장으로 국제 해운업계에서 한국해운의 권익보호를 위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또,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세계 선사 협의회(WSC) 이사회 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몸소 실천한 `해운보국`
조 회장은 평소 눈 앞의 이익보다는 장기적인 성장을 목표로, 어려운 판단을 할 때 `공동의 이익`을 기준으로 삼아 온 것으로 전해진다. 수송보국(輸送報國)이라는 선친 조중훈 회장의 뜻을 이어 수송사업은 개인적으로는 이익이 없더라도 국가 경제발전을 발전시켜 나가야 할 기간산업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 회장은 선경지명적 경영감각과 과감한 결단력으로 세계 해운시장을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지난 1994년 사장 취임 이후 한진해운은 세계 해운사상 유례없는 초고속 성장을 이뤄내 국가 해운산업 발전에 이바지하는 초석을 다져 나갔다.
한진해운은 지난 1992년 한국 최초의 4000TEU급 컨테이너선을, 1996년에는 5300TEU급 세계 최대형 초고속 컨테이너 선박을 취항시켰으며 지난해에는 미주 노선에 국내 최초의 8000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을 투입하는 등 컨테이너선 대형화와 합리화를 선도하면서 한국 해운 산업의 새 시대를 열었다.
◇각별한 `해운 사랑`과 국제위상 제고 노력
조 회장의 바다와 해운에 대한 사랑은 비단 회사 경영에서만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 1994년 제9대 한국해양소년단 연맹 총재에 선임되면서,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해양 입국의 꿈을 키울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독도사랑 어린이 수호대, 국제 청소년해양축제 등 대규모 행사를 개최하는 한편 미국과 일본 등 선진 17개국과 함께 한국이 세계 해양소년단연맹 정회원국으로 선임되도록 하는 등 연맹의 위상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지난 1997년 2월부터 2000년 초까지 한국선주협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국제선박등록제도 등의 합리적인 개선방안을 모색하고, 대형선사와 중소선사의 공존공영의 기틀 다지는 등 세계 해운시장에서 한국 선사의 경쟁력 강화에 힘썼다.
조 회장은 이러한 열정과 노력의 결과로, 지난 1996년에는 한국 해운산업의 국제경쟁력 제고와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한진해운 측은 "조 회장은 한진해운만의 리더가 아니라, 우리 해운업계를 이끌어 가는 리더였다"면서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의 신념과 철학이 계속해서 우리 나라 해운산업의 앞날을 인도할 지침이 될 것으로 믿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