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석원 작가의 ‘창덕궁 규장각 수사슴’. 사 작가는 조선후기 규장각을 통해 문예부흥을 선도했던 정조를 기품있는 수사슴으로 표현했다(사진=가나아트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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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용운 기자] 서울 토박이인 한국화가 사석원(55)은 어릴 때부터 조선의 궁궐이 친숙했다. 경복궁과 창경궁, 창덕궁, 덕수궁에 자주 드나들었다. 궁궐 특유의 고즈넉함과 비장함. 600여년을 이어온 왕의 이야기는 매혹적이었다. 특히 조선 후기의 문예부흥을 이끌었으나 끝내 부국강병의 꿈을 이루지 못한 정조는 각별했다. 조선의 망국을 막아내지 못하고 좌절한 고종에게도 연민을 느꼈다. 그리고 궁금증이 일었다. ‘왕의 고뇌를 위로하던 건 무엇이었을까.’ 사 작가는 보름달이 뜬 어느 날 어둠에 잠식당하지 않은 고궁을 바라보다 떠올렸다. ‘아! 바로 저 달빛이겠구나.’
오는 7월 12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사 작가의 개인전 ‘고궁보월’은 두 개의 소재가 핵심이다. 조선의 궁궐과 달밤이다. ‘옛궁에서 달의 그림자를 밟는다’는 제목의 뜻풀이처럼 고궁의 달밤을 그린 40여점을 내놨다. 2013년 ‘서울연가’ 전 이후 그린 신작이다.
전시에 앞서 만난 사 작가는 “달이 뜰 때 작업을 시작해 달이 질 때 끝냈다”며 “달빛의 따뜻함과 왕실의 위엄, 궁궐에 맞는 단청을 표현하기 위해 다른 작품보다 물감과 나이프를 많이 썼다”고 말했다. 덕분에 40여점 대부분은 진흙 같은 두터운 유화의 질감으로 관람객을 압도한다. 동물이 등장하는 특유의 화풍은 여전하지만 이전 작품에서 보인 동물에 비해 사실적이고 커졌다. 사 작가는 “왕이 느낀 감정을 동물로 상징하기 위해 기존의 해학적인 모습에 변화를 주었다”며 “궁궐은 서울에서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공간이지만 명성황후 시해 같은 역사적 비극이 일어났던 장소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특히 사 작가가 감정이입을 했던 조선의 왕은 정조와 고종이다. ‘창덕궁 규장각 수사슴’은 노론의 반대 속에 규장각 학사를 독려하며 개혁을 시도한 정조를 노란 보름달 아래 커다란 수사슴으로 상징해 그렸다. ‘경복궁 향원정 당나귀’는 고종이 한 살 연상인 명성황후를 위해 1873년 경복궁 별궁인 건천궁에 연못을 파 향원정을 만든 것에 영감을 받았다. 은은한 달빛을 배경으로 향원정 앞에 다정해 보이는 당나귀 식구의 모습은 고종의 삶과 대비가 돼 더욱 애절하다.
| 사석원 작가의 ‘경복궁 경회루의 용’. 화폭 위에 용을 그려 왕의 권위를 암시했다. 실제로 1997년 경회루 연못을 청소하기 위해 물을 뺐을 때 청동용 두 마리가 발견되기도 했다(사진(사진=가나아트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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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작가의 작품을 보고 있자면 강렬한 붓질에 빨강·초록·노랑 등으로 휘몰아친 원색으로 인해 순간 어지러움증이 인다. 월광욕을 해본 사람은 아는 현기증이다. 하지만 이후 마음이 편해지며 묘한 취흥이 생긴다. 달빛이 주는 마법이다. 조선의 왕도 잠시 그 마법을 빌려 근심과 고뇌를 잊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취흥과 함께 전시장 끝에 닿으면 반전이 있다. 온통 흰색만을 쓴 ‘매화 I’와 ‘매화 II’가 가다리고 있다. 사 작가는 “조선은 화려한 장식의 궁궐도 갖고 있지만 결국 자기절제를 강조한 유교이념에 지배받았다”며 “마지막에는 조선의 유교정신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했고 프랑스에서 원시미술을 공부한 사 작가는 1983년 전국대학미술전에서 금상을 차지하고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에는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을 만큼 젊은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일본 도쿄와 프랑스 파리, 미국의 뉴욕에서 개인전을 가지며 명성을 높였다. 이젠 국립현대미술관과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부, 외교통상부 등 정부기관에서 작품을 소장할 정도로 인지도가 높다.
동양화붓으로 유화를 그리는 독특한 화법을 고수하는 사 작가는 “서양화가보다는 동양화가로 불리길 바란다”며 “요즘도 눈이 오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곳이 창덕궁이고 장맛비가 내리고 난 뒤 고궁의 정취를 느끼고 싶을 땐 경복궁의 향원정을 찾곤 한다”고 말했다. 02-720-1020.
| 사석원 작가가 ‘경복궁 꽃사슴’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가나아트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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