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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을 가기 위해서는 내륙이든 해안이든 산을 넘어야 가능하다. 북에서 남으로 길게 뻗은 태백산맥이 동쪽을, 서쪽은 일월산맥이 가로막고 있다. ‘육지 속 섬’인 셈이다. 과거에는 산에 둘러싸여 숨겨져 있다고 해 ‘고은(古隱)’으로 불렸고, 후에 ‘밝은 꽃부리’란 뜻의 ‘영양(英陽)’으로 변경된 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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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에서도 수비면 죽파리는 오지 중 오지 마을이다. 조선시대 보부상들이 정착하면서 개척한 마을로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죽파(竹坡)’라고 한다. 죽파리를 감싸고 있는 산은 검마산(1017m)이다. 산이 뾰족하고 칼을 닮았다고 해서 ‘검마(劒磨)’란 이름이 붙었다. 얼마 전까지 영양군 죽파리 일대에는 휴대폰 사용이 불가능했다. 인적이 드문 곳에 각 통신사들은 기지국을 세우지 않았고, 이동통신이라는 당연한 문명의 기술도 이곳에서는 사치에 불과했다.
사람이 없다는 것은 자연에게는 축복이었다. 한반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천혜의 원시림이 보존될 수 있었고, 영양의 낮과 밤은 청정한 자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영양은 인공조명으로 인한 빛 공해도 매우 적은 도시다. 아시아 최초의 국제밤하늘보호공원에 속한 수비면 일대는 우리나라에서도 밤이 가장 어두운 지역이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나와 1시간 30분을 더 가니 죽파리 마을을 지나 자작나무 숲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입구에는 작은 커피숍 ‘카페 자작(JAJAK)’이 안내센터 겸 숲으로 가는 전기버스를 타기 위한 승강장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이곳에서 출발한 전기버스는 3.2㎞를 더 달렸다. 널찍한 임도 옆으로 청정한 계곡이 흘렀고, 좀처럼 보기 드물게 풍부한 수량이 계곡의 더 아름답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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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덕분에 숲은 원시림 그대로였다. 물박달나무와 단풍나무, 금강소나무 등 훤칠한 나무들이 청정 계곡과 함께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10여분쯤 전기버스를 타고, 올라가니 드디어 울창한 자작나무숲이 눈에 들어왔다. 죽파리 일대 국유림(634㏊) 내 30.6㏊에 들어선 자작나무는 국내 최대 규모의 자작나무 숲이다. 이 같은 규모는 축구장 40개에 해당하며, 강원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의 3배가 넘는다.
1993년 처음 식재된 자작나무들이 이제는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해 높이 20m에 30년 수령의 숲을 이루고 있었다. 당시 산림청은 금강소나무가 솔잎혹파리로 극심한 피해를 입자, 대체수목을 놓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오랜 고민 끝에 소나무 위주의 침엽수림이 대형 산불 및 산림 병해충에 취약하다는 점을 고려해 활엽수인 자작나무를 식재하기로 하고, 이 일대에서 시범조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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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둥치를 만져보면 매끈매끈하면서 약간 폭신한 느낌이 든다. 기름기 때문인지 아주 부드럽고 매끄러운 가죽을 만지는 느낌이다. 자작나무의 하얀 껍질은 잘 벗겨지는데, 이 껍질은 종이 대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73년 경주 천마총에서 하늘을 나는 천마(天馬)가 그려진 말다래가 출토됐는데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의 주재료가 자작나무 껍질이다.
자작나무가 추운 날씨에도 잘 버텨 낼 수 있는 것도 줄기의 이런 껍질 덕분이다. 기름 성분이 있는 여러 겹의 얇은 껍질이 자작나무 줄기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혹한의 추위를 버틸 수 있게 하는 이 기름 성분은 자작나무 줄기를 안 썩게 하는 기능도 있다. 활엽수인 자작나무는 위도가 높은 곳에서 자라는데, 시베리아나 북유럽, 동아시아 북부, 북아메리카 북부 숲의 대표적인 식물이다.
자작나무는 무리 지어 자란다. 홀로 자랄 수 없기에 서로 적당한 거리에서 받쳐주고 서로 북돋워 준다고 한다.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아는 현명한 나무다. 검마산 중턱에서 30년이 넘은 자작나무숲은 보는 순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숲은 초입부터 빽빽하게 자작나무들이 즐비했다. 하얀 줄기가 곧게 뻗어 있고 파릇파릇한 나뭇잎과 파란 하늘이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나무줄기에 누가 분가루를 칠한 것처럼 하얀 가루가 묻어났고, 나무껍질은 손가락 사이로 으스러지듯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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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만그루의 자작나무가 주는 이국적인 아름다움에 빠져 있는 사이 계곡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가을의 절정을 알리고 있었다. 이때 비로소 숲과 내가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순간이었다. 자작나무의 향기를 맡으며, 바람의 의자에 앉아 쉬고 있으니 해는 점점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자작나무 숲길은 3㎞의 1노선과 1.44㎞의 2노선, 1.5㎞의 3노선 등이 있으며, 신규 노선들이 보완되고 있었다. 산기슭을 가득 메운 자작나무 사이로 아담한 오솔길이 이어졌고, 수개의 포토존이 자작나무를 배경으로 보기 좋게 놓여 있었다. 자작나무숲은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할 수 있어 도보여행 마니아들과 많은 사진작가들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었다.
죽파리를 찾는 방문객들이 전국에서 쇄도하자 산림청와 경북도, 경북 영양군, 한국임업진흥원은 자작나무 숲을 기반으로 지역소멸을 막고, 산촌활성화에 나섰다. 기본적인 숲 인프라 조성·관리는 산림청이, 산촌경제 활성화 및 새로운 인구 유입은 지자체와 임업진흥원이 공조한다는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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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서 연간 5만~6만명의 방문객 쇄도…정부·지자체, 산촌경제 활성화 공조
경북도는 지난 7일 중장년 은퇴자의 산촌 생활 체험과 안정적 정착을 돕는 ‘4060 K-산촌 드림’ 사업 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지역 산림자원을 활용해 일자리와 주거, 휴양을 제공하는 귀산촌 시범사업 대상지로 영양군을 선정해 소득형, 자연형, 웰니스형 등 3개 마을을 만든다는 목표다. 중장년이 초기 투자 비용 없이 임대료만으로 산촌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산림면적이 80% 이상인 대표 산촌 지역인 영양에서 국가 명품 숲에 선정된 자작나무 숲 등 우수한 관광자원과 어수리, 천궁 등 전국 최대 산나물 생산지 이점을 활용해 첫 시범사업을 하기로 했다. 이 중 웰니스 모델로 죽파리 자작나무 숲을 활용해 단기 체류 숙박과 공유형 사무공간을 갖춘 ‘자작 누리 명품 산촌’을 만들 계획이다. 조현애 경북도 산림자원국장은 “경북 면적의 70%가 넘는 산림을 ‘돈 되는 산’으로 가꾸겠다”며 “시범사업을 통해 찾고 싶고 살고 싶은 산촌 모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울릉군을 제외하면 사실상 전국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영양군도 자작나무 숲에 매달 수천명의 방문객이 찾아 오는 점에 고무돼 있다. 영양군은 자작나무 숲을 우리나라 최고의 산림 휴양지로 만든다는 구상이다. 영양군은 지역수요 맞춤지원 공모사업과 자작나무 권역 활성화 업무 협약을 통해 자작나무 숲 관광 자원화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자작나무 숲에 힐링 허브 기반시설을 조성 중이며, 불편했던 진입로 보수 등 인프라 구축에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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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양 경북 영양군 산림녹지과 산림자원개발팀 주무관은 “산림청이 30년 동안 조림을 해서 만들어 놓은 숲이 지역에 큰 자산이 됐다”면서 “이런 볼거리들이 결국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큰 모티브 역할을 해서 현재 영양군에 13개 정도의 일자리 사업이 창출됐다”고 설명했다. 박정아 경북도 산림레저관광과 주무관도 “대규모 관광지 개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주민 소외’라는 점을 인식, 산림청, 영양군과 함께 주민을 소외시키지 않고 차근차근 지속 가능한 발전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다”며 “영양 자작나무 숲은 다른 지역과 달리 정부와 지자체가 협력해 계획적으로 접근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산림청, 영양군과 공조를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30년 전 산림 병해충으로 피폐해진 숲을 명품 자작나무 숲으로 변화시킨 주인공들이 이제는 영양이라는 오지를 전국적인 산림 관광의 명소로 만들고 있었다. 결혼식을 올린다고 할 때 ‘화촉을 밝힌다’고 하는데 이때 화촉이 자작나무를 뜻한다. 화촉의 의미처럼 영양 자작나무 숲은 모두의 축복 속에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숲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