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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현 포스코)의 설립을 주도한 고(故) 박태준 명예회장의 말이다. 이 일화는 아직까지 정·재계에서 회자된다. ‘자본, 기술, 경험도 없는 한국은 무조건 실패할 것’이란 전망에도 ‘하면 된다’는 신념 하나로 일관제철소(고로를 통한 쇳물 제작부터 최종 철강제품까지 한 번에 모두 만들 수 있는 종합제철소) 건설의 꿈을 실현시켰기 때문이다.
포항 영일만에서 첫 삽을 뜬 포스코가 4월 1일 50주년을 맞았다. 1968년 설립 이래 반 세기동안 흑자 경영을 유지하며 국가 경제발전을 이끌어왔다. 포스코의 50년 역사는 한국경제의 성장사와 궤를 같이하는 셈이다.
△고난과 역경 뚫다
처음은 쉽지 않았다. 실패만 무려 다섯 차례. 정부가 철강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58년 종합제철 건설 계획을 세웠지만 자금 부족, 정국 혼란과 국내 여론 등의 반대로 난항을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국내 첫 일관제철소는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30분 첫 쇳물을 토해냈다. 이 날이 바로 ‘철의 날’이다. 첫 일관제철소를 확보한지 12년 만인 1985년 세계 최대 규모 광양제철소 건설을 시작으로 양적 도약을 본격화했다. 광양만 바다를 매립해 마련한 이 제철소는 연간 1140만톤의 쇳물을 만들어냈다. 940만톤 체제의 포항제철소를 합쳐 포스코의 조강생산능력은 2080만톤으로 뛰어올라 단숨에 세계 3위 대형 철강사로 부상했다. 1975년 84㎏에 불과했던 우리나라 1인당 철강소비량은 1990년 선진국 수준인 500㎏을 넘어섰고, 1991년에는 600㎏을 돌파했다.
2000년대 들어 포스코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첫번째는 1997년 닥친 국제외환위기(IMF)였다. 일찍부터 경영효율화를 추구한 덕분에 포스코는 재벌대기업과 굵직한 공기업들이 무너져갈 때도 무사할 수 있었다. 2000년 민영화는 또 다른 도전이었다. 그해 10월 포스코는 이전까지 산업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지분 36%를 매각하고 완전히 민영화됐다. 명칭도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에서 포스코로 바꿨다.
△최대 위기서 구조조정 뒤 정상화
2010년대 들어 포스코의 화려한 시절은 사라지는 듯했다. 대외적으로 중국은 가격·물량 공세로 철강의 과잉공급을 유발했고, 미국은 보호무역 기조로 통상압박을 가해왔다. 2000년대 후반부터 확대한 신규 사업들이 조기에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최악의 경영 위기를 겪었다. 2008년 7조1739억원이었던 영업이익은 2014년 3조2135억원까지 줄었다. 민영화 이후 역대 회장마다 제기된 ‘주인없는 기업의 낙하산’ 논란은 주기적으로 발목을 잡았다.
△100년 기업으로의 고민
포스코의 도전은 이제 철강 ‘밖’이다. 포스코는 올해 창립 50주년을 ‘100년 기업’ 도약의 원년으로 삼겠다는 포부다. 우선 신사업 전략을 통해 철강과 비철강 사업의 수익 규모, 국내외 사업 비중을 각각 절반씩 구성한다는 방침이다.
또 기존 하드웨어 중심의 사업을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등 최신 소프트웨어에 접목하는 스마트 기업으로의 전환도 추진 중이다. 철강산업은 물론 에너지, 건설 분야에 이르기까지 그룹 본연의 사업에 정보통신기술(ICT)을 융합하는 스마타이제이션(Smartization·스마트화)도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자체 경쟁력을 높이고,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해 나간다는 복안이다.
권오준 회장은 창립 50주년 기자간담회에서 “리튬 사업은 포스코를 먹여 살릴 큰 사업”이라며 철강뿐 아니라 인프라, 신성장(소재) 사업 등 3개 핵심군을 키워 현재 60조인 매출을 8배 불려 500조원 그룹(100주년 목표)을 만들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