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시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할 때 금융 당국이 의사의 역할을 해야 한다. 필요한 대책이 있다면 실시하고 규제를 완화 혹은 강화해 시장의 기능을 살린다. 기업의 자금 조달을 맡던 회사채 시장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자 금융당국이 지난 7월8일 ‘회사채 시장 정상화 방안’을 내놨다. 금융당국이 회사채 시장에 내린 진단으로 환자는 정상화됐을까. 18회 SRE 설문 결과 금융당국이 적절한 대응으로 회사채 시장 안정화에 기여했다고 답한 응답자는 18명(16%)에 불과했다.
이상 증상 보인 회사채 시장
지난해 웅진그룹의 갑작스러운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 신청으로 회사채 시장에는 ‘A’급 회사채에 대한 기피 현상이 확대됐고, 지난 4월 STX그룹 역시 법정관리행으로 찬바람마저 불었다. 결정타는 미국이 날렸다. 6월 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위원회 의장이 출구전략을 본격화하겠다는 발언에 미국 채권금리가 급등했고 국내 채권시장은 얼어붙었다.
금리 변동성이 심해지자 회사채 발행부터 줄었다. 특히 ‘AA’급 이상은 월 발행량이 2조원대를 계속 웃돈 반면 A급의 발행량은 6월 500억원으로 전달보다 9000억원 쪼그라들었다. BBB급의 발행량 역시 3110억원에서 1600억원으로 절반 가까이 줄어들면서 양극화를 보였다.
투자심리도 냉랭했다. 신용등급이 ‘AAA’로 최상위인 금융지주 회사채마저 미매각되는 등 AA급 이상의 우량채에 대한 6월 수요예측 참여율이 올해 들어 처음으로 100%를 넘기지 못했다. 올 들어 매월 수요예측 참여율 100%를 넘겼던 A급 회사채 또한 7월에 56.6%로 뚝 떨어진 뒤 9월까지 100%를 회복하고 있지 못하다.
수요가 제한된 회사채 구조 자체를 바꾸려는 작업도 이뤄졌다‘. BBB’급 이하 회사채를 일정 비율 이상 포함한 하이일드 펀드에 세제 혜택을 주는 등 회사채 펀드 규정을 합리화하고 투자자 요건을 완화해 적격기관투자가(QIB) 제도를 개선하는 방안이 마련됐다. 회사채 수요예측 제도에서 수요기반을 확대하고 인수 리스크 관리를 강화토록 하는 개선책도 포함됐다.
지원한다는데..기업 ‘떨떠름’
금융당국이 차환을 돕겠다고 나섰지만 정작 지원을 신청한 기업은 10월 말 현재 한라건설과 현대상선, 동부제철 세 곳뿐이다. 낙인효과에 대한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정부에 자금 지원을 요청할 만큼 재무적 여건이 좋지 않다는 의미로 시장에 비칠 수 있다. 한 SRE 자문위원은 “2008년 시행됐던 대주단협약의 경우 지원 대상을 공개하지 않아 어려운 기업도 부담 없이 지원 받았다”며 “그러나 이번 방안은 투명하게 모든 내용이 공개되기 때문에 신청을 꺼리는 기업이 많다”고 설명했다.
워크아웃에 준하는 ‘여신거래특정약정(MOU)’이 부담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차환 발행을 지원받기 위해 기업은 주채권은행과 MOU를 맺고 차환발행심사위원회를 거친다. 이 MOU에는 기업의 자구노력 계획이 포함되며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대주주 지분 처분, 경영진 교체 등 제재가 가해진다. 당국 입장에서는 지원받은 기업의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한 방도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주채권은행의 간섭이 반가울 리 없다.
또 다른 문제는 지원 대상에 대한 일관성이다. 지난 10월16일 동부제철이 회사채 400억원을 발행했을 때 시장의 예상을 깨고 기관이 199억원 수요예측에 참여했다. 신용등급 ‘BBB’인 동부제철에 투자한 곳은 ‘정책금융공사’였다. 동양 사태 후 회사채 시장이 경색될 것을 우려한 당국의 배려였다는 것이 시장의 분석이다. 역시 BBB급인 두산건설 등은 회사채를 발행할 때마다 산업은행이 주관사로 나서 물량의 50%를 인수하기도 했다.
정부 개입보단 시장 기능 맡겨야
근본적으로 정부의 진단이 잘못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회사채 시장이 위축됐다기보다 개별 한계기업의 자금 조달이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이에 맞는 해결책을 내놓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SRE 자문위원은 “같은 ‘BBB’급이더라도 건설, 해운, 철강 등 취약업종이 아닌 기업은 회사채로 자금을 조달하는 데 무리가 없다”며 “기업 재무구조는 괜찮은데 신용등급이 낮아 일시적으로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이라면 지원하는 게 맞지만 정부가 한계기업을 지원하면서 외려 업종의 구조조정을 지연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같은 신용등급이더라도 금리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본드웹에 따르면 3년물 기준으로 11월1일 ‘A-’등급의 민평금리는 4.131%지만 AJ렌터카, 서흥캅셀, 포스코플랜텍 등의 민평금리는 3% 후반대에 머물고 있다. 반면 현대상선, 무림페이퍼, 코오롱인더스트리 등의 3년물 민평금리는 4.500%를 훌쩍 넘겼다. ‘BBB+’등급에서 3년물 두산건설의 민평금리는 9.135%로 가장 높은 데 비해 노루페인트, 아시아나항공 등의 민평금리는 4%대로 안정적이다. 신용등급이 낮아도 펀더멘털만 양호하다면 기업은 얼마든지 자금을 회사채로 조달할 수 있다. 기업의 자금조달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잠시 인공호흡기를 대주는 꼴밖에 안 된다”며 “정부가 개입할 경우 제대로 된 구조조정이 이뤄지기 더욱 어려워진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