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式 성장모델 완성 '서강학파 대부'

  • 등록 2013-05-20 오전 8:25:25

    수정 2013-05-20 오전 8:25:25

[이데일리 정태선 이지현 기자] “나는 지금도 컴퓨터를 잘 다룹니다만은 내 나이에 컴퓨터와 친숙한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모든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의 사용법도 혼자서 배웠습니다. 독학이 나의 천성처럼 되었습니다.”

고 남덕우 전 총리(연합뉴스)
한국경제 성장의 산 증인이자 주역인 전 국무총리 남덕우. 박 전 대통령 시절 경제개발을 주도한 이른바 ‘서강학파’의 대부다. 한국 경제가 격동 속에서 눈부신 성장을 이룩했던 1970년대 고인은 재무부장관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국무총리 등을 거치면서 대한민국 경제개발계획을 선두에서 지휘하며 한국경제 현대사를 써내려갔다.

1924년 경기 광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경제학 석사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오클라호마주립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64∼69년)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5년간의 각고 끝에 체계적인 미시경제학 이론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한 ‘가격론’을 세상에 내놓으며 한국경제의 체계적인 성장이론을 제공한 ‘서강학파’의 좌장을 맡았다.

1969년 고(故)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제24대 재무부 장관에 임명되면서 경제관료로서 삶을 시작했다. 당시 검은 뿔테안경 쓴 45세 젊은 장관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이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74~78년), 대통령 경제담당 특별보좌관(79년), 제14대 국무총리(80~82년)를 연임하며 1970년대 대한민국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이끌었다. 14년간 경제 전반을 주도하고 정권 과도기를 안정적으로 이끌며 수출한국의 신화를 일군 3·4·5공화국 경제와 정치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공직 생활을 마감하고 1983년부터는 한국무역협회 회장(83~90년)으로 재임하며 삼성동 종합무역센터 건립을 주도했다. 또 다양한 무역지원제도를 건의하고 민간통상외교로 무역인프라 구축을 통해 무역입국의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산학협동재단 이사장(83~91년), 한일협력위원회 회장(05년~13년), 한국선진화포럼 이사장(05년~13년)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고령에도 그는 컴퓨터를 통한 세상과의 교류를 지속해왔다. ‘컴퓨터 1세대’로 통하는 그는 경제문제, 세계정세 등에 대한 인터넷 서핑뿐만 아니라 외부원고나 강연원고 등도 모두 컴퓨터로 처리하며 노익장을 과시해왔다. 이렇게 나온 그의 저서로는 가격론(1970)외에도 태평양 공동체와 무역정책(1980) 국제화 시대의 한국경제(1997) Korea’s Economic Growth in a Changing World(1997) 동북아로 눈을 돌리자(2002) 한국, 과거를 딛고 미래를 보자(2007) 등이 있다.

그는 최근까지 경제계에서 꾸준히 활동하며 하루 1시간씩 맨손 운동 등으로 건강을 관리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오랫동안 앓아온 전립선암과 노환이 겹치면서 결국 유명을 달리해 주변을 숙연케 하고 있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한덕수 무역협회장은 “주말마다 허허벌판이었던 잠실 건설현장에 찾던 모습이 기억난다”며 고인을 추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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