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미국에 사는 한국인이라면 "일본 자동차가 정말 많기는 많다"는 생각을 한 두번 안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도시냐 농촌이냐, 서부냐 동부냐 남부냐 등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본차가 거리를 점령했다"는 표현은 결코 과언이 아니다.
동부 지역인 뉴욕과 뉴저지주의 경우 거리를 지나가는 승용차 10대중 6~7대는 일본차다. 집 앞만 나가 봐도 도요타, 혼다, 닛산 등 `일본 빅3` 브랜드를 단 자동차가 넘쳐난다. 반면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미국 빅3`는 가물에 콩나 듯 지나간다. 오히려 유럽차인 벤츠와 BMW가 전통적인 미국 브랜드보다 더 많이 눈에 띈다.
이 게 바로 미국 자동차 산업의 현 주소다. 상황은 일반적 예상보다 심각한 수준이다.
100년이 넘는 미국 자동차 역사의 자존심 제너럴모터스(GM)와 포드가 망할 수 도 있다느니, 르노-닛산-GM의 3각 연대가 논의된다느니, 생존을 위해 공장 문을 닫고 직원을 줄였다느니, 포드가 고급 브랜드인 애스턴 마틴을 판다느니, CEO를 항공업계에서 영입했느니 하는 뉴스가 하루가 멀다하고 디트로이트발로 쏟아져 나오는 근본 배경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현지 언론에선 미국 자동차산업의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70여년간 세계 자동차업계 1위로 군림해 온 GM이 이 지경까지 추락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자존심이 상할 만큼 상했다. 또 해당 산업의 부가가치인 전후방 효과가 가장 큰 자동차산업이 극단적인 위기에 몰렸으니 미국 제조업에 대한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자동차 회사의 최종 산출물인 자동차 자체를 대상으로 한 분석 만큼 정확한 것은 없을 것이다. 내부와 외부 요인이 회사의 시스템, 즉 가치사슬이라는 용강로를 거치면서 나온 결정체가 바로 자동차이고, 이 것이 그 회사 경쟁력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신기술과 소비자 기호를 바탕으로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2만개 이상의 부품으로 만드는 신차 경쟁력이 가장 중요한 바로미터로 여겨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특히 소비자 기호를 맞춘 신차를 제 때 개발해 출시할 수 있는 경쟁력이 높아지는 추세에 있는지, 아니면 반대로 떨어지는 추세에 있는지가 핵심 포인트다. 신차 개발 시스템의 경쟁력이 무너지면 판매고 뭐고 간에 그 다음에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한국의 자동차산업 역사속으로 잠깐 들어가보자.
기아차의 경우 지난 97년7월 부도유예협약에 들어가기 전인 95년에 출시된 중형차 `크레도스`를 제외하고 주력 모델중 변변한 신차가 사실상 없었다.
대우차도 96년말~97년초 `라노스`, `누비라`, `레간자` 등 3총사를 내놓고 잠깐 바람몰이를 하긴 했지만 그 이후의 신차 개발은 사실상 올스톱됐다.
미국 자동차업계에서 최근 몇년간 나타난 징후도 흡사하다.
예를 들어 혼다의 `시빅`은 5년마다 새 디자인이 나오지만 경쟁차종인 GM `시보레`의 새 디자인 변경은 9년이나 소요되고 있다. 이 것만 놓고 보면 `시보레`의 경쟁력은 `시빅`의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경트럭 `F1` 시리즈의 고수익에만 지나치게 안주했던 포드가 최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만한 승용차 신모델을 내놓은 기억은 희미하기만 하다.
경영난 타개를 위해 브랜드 매각 등에 나선 포드는 포드가(家)의 직할체제에서 5년만에 다시 전문경영인 체제로 회귀했다.
항공업체인 보잉에서 잔뼈가 굵은 앨런 멀럴리가 신임 CEO로 선임됐다. 자동차업계 출신이 아니라서 의문부호를 다는 시각도 적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신차 개발 시스템의 경쟁력 복원 여부가 그의 도전 성공여부에 대한 최대 관건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