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준기 산업부 차장] 2007년 12월28일 당선인 신분으로 가장 먼저 전국경제인연합회를 찾은 이명박(MB) 전 대통령은 “차기 정부는 ‘비즈니스 프렌들리’로 만들겠다”고 했다. 당시 비즈니스 프렌들리는 ‘대불공단 전봇대’ 발언과 함께 친기업 정권의 상징적 단어가 됐다. 그러나 MB 정부는 미국산 쇠고기 파동, 글로벌 금융위기,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등 숱한 파란을 겪으며 지지율 급락을 경험했고, 2009년 후반기 돌연 친서민 기조로 정책 방향을 확 바꿨다. 그해 9월 “대기업의 선제적 투자는 사회적 책임이자 소명”이라는 발언과 함께 대기업에는 사회적 책임론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MB는 부침 속에서도 지지율 고공 행진을 거듭했고 이내 정권 재창출까지 이뤘다.
최근 재계 안팎에선 지지율 급락으로 정치적 위기에 놓인 윤석열 대통령이 자칫 MB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하는 목소리가 제법 들린다. ‘민간 주도 성장’을 내세우며 화려하게 정권을 탈환한 윤 정부가 국면전환을 위해 친서민·반기업으로 국정운영 기조를 뒤집을 수 있다는 우려다.
|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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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절 특사는 그 전조 현상이다. 사면·복권 대상에 이름을 올린 경제인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 등 4명. 얼핏 MB, 김경수 전 경남지사 등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들이 일괄 배제된 것과 비교될 수는 있으나 실상을 보면 경제계의 바람과는 차이가 크다. 경제계 고위 관계자는 “경제단체들이 법무부와 청와대에 사면·복권을 건의한 경제인은 얼추 수십 명에 달한다”며 “고작 10분의 1 정도 수준만 사면·복권 대상이 된 것”이라고 했다.
그간 수세에 몰렸던 정부들의 가장 큰 특징은 포퓰리즘의 정치적 활용이었다. MB 정부는 민심을 돌리고자 재래시장 방문 등 서민 행보를 연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등록금 후불제, 보금자리주택, 미소금융 등 당시 시민단체나 민주노동당(정의당 전신) 등에서나 주장했던 정책들까지 과감히 도입했다. 최근 논란의 대상에 다시 오른 대형마트 의무휴업제 역시 MB 정부의 작품이었다. 대신, 대기업을 향해선 법인세 인하 등 감세 정책에도, 투자 미진·일자리 증가세 미흡 등을 꼬집으며 “사회적 책임”을 압박했다. 당시 여권 안팎에서 분출했던 ‘우측 깜빡이를 켜고 좌회전을 하고 있다’는 비아냥도 뭉갰다. 그만큼 정치적 이득이 컸다. 한때 10% 대에 그쳤던 MB 지지율은 2009년 친서민 정책 시행 이후 50%대까지 치솟았으며, 퇴임 때까지 부침 속에서도 30%대(리얼미터 기준)의 안정적 지지율을 유지했다.
국내 10대 기업은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인 지난 5월 향후 5년간 1000조원을 투자해 일자리 30만개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글로벌 경제 위기 속 반도체 등을 둘러싼 미·중 패권경쟁이 한창이지만, 위기를 기회로 만들겠다는 기업들의 복안이 묻어났다. 이 와중에 삼성·SK 등 대기업들은 자진해서 2030 부산엑스포 유치에도 사활을 걸고 있다. 정치적 위기 타개를 이유로 기업들의 기를 죽이는 자충수는 두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