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에너지 공기업 A사에 20년 넘게 다니고 있는 박동수(가명·54) 실장은 임원으로 승진할 생각이 없다. 아니, 승진을 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직원으로 남을 경우 정년 60세가 보장되는 것에 비해 임원이 되면 2년 계약이 끝난 후 퇴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는 임원에 승진하고 2년 뒤 사라지는 선배들을 많이 봐 왔다. 박 실장은 “임원 승진은 명퇴(명예퇴직)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공기업 B사에 다니는 이승호(가명·53) 본부장은 최근 기관장으로부터 이사 승진 권유를 받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대학에 다니는 딸을 두고 있다. 몇년 후 딸을 결혼시키려면 막대한 돈이 필요한데, 임원이 되면 연봉이 지금보다 20% 넘게 줄어들고 결혼 시점에 회사를 다닐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이 본부장은 기관장에게 이같은 사정을 읍소했다.
정부가 공공기관 개혁을 추진한 이후 공기업 직원들이 임원 승진을 기피하는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신의 직장’으로 불리는 공기업의 ‘별’을 마다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계약직으로 전환돼 정년이 보장되지 않고, 연봉이 오히려 1급보다 줄어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 공기업 임원은 이러한 혜택이 전혀 없다. 정부가 지난해부터 시행한 ‘공공기관 임원 보수지침’ 때문이다.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인 알리오에 따르면 공기업 기관장 평균 연봉은 1억5434만원이다. 임원의 연봉은 기관장의 80%를 넘지 못하도록 돼 있다. 1억원 남짓 받는다는 얘기다. 고참 부장은 이보다 높은 연봉을 받는 경우가 많다. 평가등급이 D·E인 공기업의 임원은 성과급도 챙길 수 없다.
미래가 밝다면 연봉이 삭감되는 것은 감내할 수 있다. 그러나 공기업 임원의 임기는 2년이다. 이후 계약은 1년 단위로 하는데 3년을 넘기는 경우는 드물다. 55세에 임원으로 승진한다면 58세에는 그만둬야 한다는 뜻이다. 정년보다 2년 빠른 퇴직이다. 공기업 기관장은 대부분 이른바 ‘낙하산’ 차지이기 때문에 임원이 돼도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없는 구조다.
박 실장은 “연봉이 줄어들고 퇴직이 빨라지는데 누가 승진을 하려고 하겠느냐”고 물었다. 이 본부장은 “57살 때 다시 권유를 받으면 임원 승진을 고려해 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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