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잇다’와 ‘잊다’

정재숙 전 국가유산청장
  • 등록 2024-10-02 오전 5:00:00

    수정 2024-10-02 오전 5:00:00

[정재숙 전 국가유산청장] ‘잇다’는 ‘끊어지지 않게 계속하다’는 뜻을 지닌 동사다. 문화유산 분야에서 유독 이 단어가 자주 쓰이는 것은 그만큼 ‘끊어지려는’ 뭔가가 많고 계속하도록 도와줘야 할 분야가 널려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아울러 ‘잇다’야말로 문화유산 영역의 핵심 의무임을 보여준다.

지난달 22일까지 덕수궁 돈덕전과 덕홍전에서 열린 ‘시간을 잇는 손길’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전시실에서 이달 13일까지 열리는 ‘지금, 잇다’전은 입을 맞춘 듯 ‘잇다’를 전시 제목에 넣었다. ‘시간을 잇는 손길’은 국가무형유산 지정 60주년을 기념해 전승 취약 종목 활성화를 위한 특별전이고 ‘지금, 잇다’는 대한민국예술원 개원 70년을 기리는 전시다.

두 전시를 돌아보니 이름 하나가 떠오른다. 예용해(1929~1995) 선생이다. 그는 1960년대 초 신문기자 신분으로 끊어질 위기에 놓인 무형유산의 자취를 찾아 ‘인간문화재’(人間文化財)라는 단어를 만들어 널리 퍼뜨렸다. 그가 1963년 9월 펴낸 책 ‘인간문화재’ 또한 회갑을 넘겼으니 여러모로 인간문화재감이다.

이 책은 예용해 선생이 1960년 7월 10일부터 1962년 11월 30일까지 한국일보에 연재했던 기사를 한데 묶어 놓은 것이다. 예 선생은 책 끝머리에 붙인 발문에 이 책 발간의 마음을 풀어놓았다. “내용이 엉성한 채 굳이 책으로 내는 것은 고유한 우리 문화라고 해야 옳을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 너무 아랑곳하지 않는 일이 원통(怨痛)하고 또 불만(不滿)했던 까닭이다.” 원통이란 단어가 가슴에 사무친다.

세월 따라 없어지는 것 중에 ‘솜씨’가 있다. 특정 손재주가 사라지는 까닭은 찾는 이가 없어서다. 이른바 시장 논리다. 수요가 없으면 솜씨는 퇴화하다가 소멸한다. 이를 막기 위해 마련한 제도가 중요무형유산(현 국가무형유산)이다. 바로 예용해 선생이 주창했던 인간문화재다. 보존 가치가 큰 순서대로 나라가 나서 지원하며 독려해도 소리 없이 자진(自盡)하는 솜씨를 다 지킬 수는 없다.

그 한 예가 용수석이다. 화문석, 왕골, 죽석 등 여러 종류의 돗자리가 있지만 용수석(龍鬚席) 또는 등메라 부르는 자리를 으뜸으로 쳤다. 조선 왕가에서 외국 군주에게 선린외교를 할 때 선물 품목에 꼭 들어 있던 게 이 용수석일 만큼 국제적으로 이름난 공예품이다. 진상품의 대명사였던 용수석의 맥은 알아주는 이가 없자 50여 년 전 끊어졌다. 용수석 짜는 솜씨가 사라지니 그 재료였던 용수초(龍鬚草)도 야생화가 돼 이제는 구할 수 없게 됐다. 이 책 427쪽에는 등메장(匠)인 이산용 씨가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한마디가 나온다. “제발 이 솜씨가 그대로 시들지 않도록 선상님, 제발 힘 좀 써 주십시오. 선상님….”

솜씨에 관한 잊을 수 없는 기록 하나가 있다. 예용해 선생이 하루는 경복궁 대목(大木) 일을 마지막으로 했던 한 도편수를 만났다. 도편수는 집을 지을 때 총책임을 맡는 우두머리 목수다. “궁이 수백수천 칸 한옥인데 그 설계도를 어떻게 그립니까.” 그 도편수 대답이 “그런 거 없다. 내 머릿속에 다 들어 있다”였다. “그럼 어느 정도 자질을 갖춰야 궁 대목의 도편수가 될 수 있습니까”라고 했더니 “국무총리감은 돼야”라는 답이 돌아왔다. 예 선생은 “도편수의 가슴 속에는 영의정, 국무총리도 얕볼 수 있는 도도한 자긍심이 간직돼 있었다”며 그런 투철한 장인 정신과 심신 수련이 우리 전통공예품에 스며 있다고 기렸다.

예용해 선생은 우리 전통공예의 맥이 가물가물한 큰 이유가 아껴 사랑하며 사용해 주는 이가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한탄한다. “이름 없이 태어나서 이름 없이 돌아가는 그들의 눈길은 못내 잊을 수가 없을 것만 같다. 곁눈질을 모르던 눈길들이었다. 한갓 일만을 응시해 오던 눈길들이었다. 모든 것을 수굿이 참고 견디어 온 눈길들이었다.”

그 눈길들을 받잡는 준엄한 한마디가 ‘잇다’다. ‘잇다’를 ‘잊으면’ 나라도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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