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전시를 돌아보니 이름 하나가 떠오른다. 예용해(1929~1995) 선생이다. 그는 1960년대 초 신문기자 신분으로 끊어질 위기에 놓인 무형유산의 자취를 찾아 ‘인간문화재’(人間文化財)라는 단어를 만들어 널리 퍼뜨렸다. 그가 1963년 9월 펴낸 책 ‘인간문화재’ 또한 회갑을 넘겼으니 여러모로 인간문화재감이다.
이 책은 예용해 선생이 1960년 7월 10일부터 1962년 11월 30일까지 한국일보에 연재했던 기사를 한데 묶어 놓은 것이다. 예 선생은 책 끝머리에 붙인 발문에 이 책 발간의 마음을 풀어놓았다. “내용이 엉성한 채 굳이 책으로 내는 것은 고유한 우리 문화라고 해야 옳을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 너무 아랑곳하지 않는 일이 원통(怨痛)하고 또 불만(不滿)했던 까닭이다.” 원통이란 단어가 가슴에 사무친다.
그 한 예가 용수석이다. 화문석, 왕골, 죽석 등 여러 종류의 돗자리가 있지만 용수석(龍鬚席) 또는 등메라 부르는 자리를 으뜸으로 쳤다. 조선 왕가에서 외국 군주에게 선린외교를 할 때 선물 품목에 꼭 들어 있던 게 이 용수석일 만큼 국제적으로 이름난 공예품이다. 진상품의 대명사였던 용수석의 맥은 알아주는 이가 없자 50여 년 전 끊어졌다. 용수석 짜는 솜씨가 사라지니 그 재료였던 용수초(龍鬚草)도 야생화가 돼 이제는 구할 수 없게 됐다. 이 책 427쪽에는 등메장(匠)인 이산용 씨가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한마디가 나온다. “제발 이 솜씨가 그대로 시들지 않도록 선상님, 제발 힘 좀 써 주십시오. 선상님….”
예용해 선생은 우리 전통공예의 맥이 가물가물한 큰 이유가 아껴 사랑하며 사용해 주는 이가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한탄한다. “이름 없이 태어나서 이름 없이 돌아가는 그들의 눈길은 못내 잊을 수가 없을 것만 같다. 곁눈질을 모르던 눈길들이었다. 한갓 일만을 응시해 오던 눈길들이었다. 모든 것을 수굿이 참고 견디어 온 눈길들이었다.”
그 눈길들을 받잡는 준엄한 한마디가 ‘잇다’다. ‘잇다’를 ‘잊으면’ 나라도 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