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김혜순(68) 시인은 ‘시 쓴다’ 하지 않고, (몸이) ‘시 한다’고 표현한다. 진리로서 굳어진 것, 당연시되는 것, 은유로써 세상을 재현하는 남성적 시 작법의 거부다. 재현의 의지를 가진 남성 시인의 은유와는 다른, 여성 시인으로서의 ‘행함’이라는 게 김 시인의 설명이다.
한국 현대시의 지평을 넓혀온 ‘시력 44년’ 김혜순 시인의 인터뷰집 ‘김혜순의 말’(마음산책)이 나왔다. ‘문단계 아이돌’이라 불리는 후배 황인찬(35) 시인이 김 시인을 인터뷰한 기록이다. 지난해 1월부터 7월까지 서면으로 주고받은 대화를 엮었다.
‘글쓰기의 경이’라는 부제를 단 책은 육체, 고통, 죽음, 타자성, 억압, 여성으로서의 글쓰기 등 그의 시 세계에서 두드러지는 주제 의식들을 시인의 생애와 겹쳐 살펴볼 수 있는, 일종의 ‘김혜순 안내서’라 할만하다. 김 시인의 삶과 작품 세계가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으며 확장해 나갔는지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읽다 보면 두 시인의 대화를 몰래 엿듣는 기분이 든다.
여성으로서 詩를 쓴다는 것
김 시인은 1979년 등단한 이래 줄곧 ‘여성과 몸의 언어’를 탐구하며 ‘시의 정치성’에 바투 다가섰다. 억눌려 은폐되거나 획득하지 못한 여성의 말이 곧 김 시인의 언어였다. 1980년대 군부 독재 시대에는 ‘장검 대신 깡통 차고 늠름하게 펄럭’이는 허수아비를 비웃었고(‘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중|1985·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에서 남성에 비해 늘 차별과 혐오, 폭력과 소외 상태에 노출되어온 여성의 몸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치열하게 시를 썼다. ‘‘시한다’는 것은, 내가 내 안에서 내 몸인 여자를 찾아 헤매고, 꺼내놓으려는 지난한 출산 행위와 다름이 없다.’(시론집 ‘여성, 시하다’ 중|2017·문학과지성사).
인터뷰의 주요 키워드 중 하나는 ‘고통’이다. 고통을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할 것인지 깊게 고민해 온 시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김 시인은 시집 ‘죽음의 자서전’(2016·문학실험실)으로 그리핀 시 문학상을 받고 1주일 뒤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모친의 부재를 딛고, 시집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2022·문학과지성사)를 냈다. “비탄이 제게 침묵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사람들과 연대하는 게 시인에게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시인은 고등학교 시절 친구 ‘명희’네 집의 장서들을 독파한 뒤 “책의 언어들로 (내 안이) 꽉 차고 넘치게 되면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친구네 집은 세계문학전집부터 사상전집까지 갖추고 있었는데 그 책을 모두 읽은 건 그 집 식구들이 아니라 나였다. 그 책들을 볼 때마다 ‘저 책들은 나의 것이야’라고 생각했다. 시도 읽는 사람의 것이다. 시인은 유령처럼 독자의 시선에서 다시 탄생한다.”
문학청년들에게 시 창작과 시론을 가르쳐온 그에게 선생(先生)이란 ‘먼저 태어난 사람’이라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넘어 “먼저 죽는 수치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다. “이제까지 있어 온 것을 말함으로써 그것을 듣는 학생들이 이제까지 없었던 것을 발명하고 발견하도록 장려하는 사람”인 선생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죽음을 학생들에게 보여야 하는 부끄러운 존재라는 것이다.
시인이란 누구인가. 인공지능(AI)의 기술 속도가 인간보다 더 빨라진 오늘날, 시와 시인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는 말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터뷰를 진행한 시인 황인찬은 “우리는 시를 읽고 쓰는 동안 어딘가를 향해, ‘나’를 벗어나 그 너머를 향해 열릴 수 있”다며 “김혜순의 말이 전하는 그 강렬하고 선명한 언어를 깊이 받아들이고, 더 먼 곳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고 이야기한다. 김혜순 시인은 책 첫 장에 이런 친필을 남겼다. “문학은 질문이기에, 이 책을 완성한 건 내가 아니다”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