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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 안정성을 위하여 민법이 두고 있는 제도 중 소멸시효가 있다. 소멸시효란 권리자가 소송 제기 등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사실상태가 일정기간 계속된 경우에 그 권리의 소멸을 인정하는 제도이다. 예를 들면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은 피해자 등이 손해,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간 행사하지 아니하면 시효로 인하여 소멸하고(민법 제766조 제1항),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을 경과한 때에도 마찬가지로 시효로 인하여 소멸한다(민법 제766조 제2항).
따라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를 함에 있어서는 불법행위가 있던 날로부터 10년 이내에, 불법행위를 안 날로부터 3년 이내에 권리를 행사하여야 한다. 문제는 법문에 쓰인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이라든가 ‘불법행위를 한 날’이 언제인지를 특정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많은 손해배상청구 사건에서 소멸시효와 관련하여 다툼이 일어나고 있다.
불법행위의 피해자가 아동인 경우 그 법정대리인이 소멸시효가 도과하기 전에 가해자를 상대로 민사상 손해배상청구를 하지 아니하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없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아동 성폭력 사건 등의 경우 피해자가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사실을 알리기 두려워하여 외부에서 피해사실을 모른 채 피해일로부터 10년이 경과해 버리는 경우도 많다. 이 경우 성년이 지난 피해자가 가해자를 상대로 민사상 손해배상청구를 하게 되면 위 청구가 인용될 수 있을까? 관련된 사례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의정부지법이 지난해 11월7일 선고한 2018나214488 손배소송 사건 항소심 판결이다.
앞서 원고는 2016년 5월 주니어 테니스대회에서 우연히 피고와 마주친 후 성폭력 피해 기억이 떠오르는 충격을 받아 3일간 기억을 잃고 빈번한 악몽, 위장장애, 두통, 수면장애, 불안, 분노, 무기력 등을 겪고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2016년 6월에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은 원고는 2018년 6월 피고를 상대로 법원에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이 사건에서 원고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인용되기 위해서는 소멸시효의 장벽을 넘어야만 했다. 피고의 마지막 범행일은 2002년 8월이었으나 원고가 손배소송을 제기한 시점은 2018년 6월로 언뜻 보기에도 15년이 지나 소멸시효가 완성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피고 역시 소송에서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소멸시효 완성에 관한 피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선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과 관련하여서는 형사법원이 피고에게 강간죄 유죄판결을 선고한 2017년(1심 판결)에 원고가 비로소 피고의 불법행위의 요건사실에 대해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되어 손해배상청구가 가능하였다고 보았다.
필자는 이 판결에 대해서 법적 안정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아동 성폭력 사건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정의에 부합하는 판결을 내렸다고 평가한다. 법원은 이 판결을 통하여 소멸시효의 기산점과 관련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기준을 제시하였다. 가해자가 형사소송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음에도 민사상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없었던 아동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이 판결이 위안과 희망이 되기를 바라본다.
이성연 변호사 이력
△연세대 철학·법학 전공 △전 법무법인 이일 변호사 △전 법무법인 소원 변호사 △현 이광덕·이성연 법률사무소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