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 핑퐁에 멍드는 기업]책임 떠넘기기식 감사에 발동동

  • 등록 2020-03-17 오전 2:00:00

    수정 2020-03-17 오전 2:00:00

[이데일리 이동훈 기자]
[이데일리 박종오 이광수 기자] 코스피(유가증권 시장) 상장사인 A기업은 올해 정기 주주총회 개최일을 열흘여 앞두고 회계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다. 재무제표 감사를 맡은 회계법인이 이 회사의 기계 감가상각 기간 등 기존 회계 처리 방식에 문제가 있다며 지난 몇 년간 회계 장부를 통째로 수정하라고 요구해서다. 그러나 정작 과거 A사를 감사했던 이전 회계법인은 난색을 보이며 A사만 감사보고서 제출 시한을 어길까 봐 중간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16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12월 결산 상장사의 사업보고서 제출 시한이 이달 말로 다가오며 회계법인 간 책임 떠넘기기에 고충을 호소하는 기업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상장사의 경우 오는 30일까지 외부 회계법인의 감사 의견을 포함한 사업보고서를 금융위원회와 한국거래소에 제출해야 한다. 이를 못 지키면 상장 폐지 심사까지 받을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지만, 감사인들은 회계 처리의 해석 문제를 놓고 서로 ‘핑퐁’을 치는 것이다.

특히 이 같은 현상은 감사인이 바뀐 회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시가총액 약 2조8000억원 규모의 국내 제약 업계 3위 업체인 한미약품(128940) 지주회사 한미사이언스(008930)가 대표적인 사례다. 한미사이언스는 새로 선임된 회계 감사인이 자회사인 한미약품을 한미사이언스가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종속회사로 봐야 한다며 회계 처리 수정을 요구해 지난 1월 금융감독원과 한국회계기준원이 공동 운영하는 질의 회신 연석회의의 심의 도마 위에까지 올랐다.

2016년 대우조선해양 분식 회계 사태를 계기로 회계 부정을 방치한 감사인에게 감사보수의 5배를 과징금으로 물리는 등 법적 제재가 대폭 강화되면서 새 감사인이 회사의 종전 회계 처리를 문제 삼고 나서는 사례가 많아진 것이다. 최대한 깐깐하게 규정을 적용해야 사후 감사 책임이나 제재를 ‘면피’할 수 있어서다.

손혁 계명대 회계학과 교수는 “상장사에 적용하는 국제회계기준(IFRS)은 회계 처리의 원칙을 제시하고 재량권을 주는 방식이어서 판단이 필요한 부분이 많다”면서 “감사인마다 판단 근거가 다르다 보니 전기와 당기 감사인 간 의견 불일치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한 대형 회계법인의 고위 관계자는 “이전 감사인 입장에서는 새 감사인의 수정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자기네가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어서 충돌할 수밖에 없다”며 “회계 처리 기준의 문제는 구체적인 앞뒤 정황을 모두 파악해야 하는 만큼 중재 기구에 가는 일 자체가 쉽지 않고, 정부도 기준에 맞게 판단하라고만 할 뿐 책임을 안 지려고 한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문제는 앞으로 이 같은 전·현 감사인 간 신경전에 기업만 등 터지는 일이 많아질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말부터 ‘주기적 감사인 지정 제도’를 본격 시행하면서 국내 상장사 220개가 정부 지시에 따라 올해 감사인을 바꿨기 때문이다. 주기적 지정제는 상장사 등이 6년 연속 감사인을 자유 선임하면 이후 3년은 금융 당국이 감사인 선임을 지정하는 제도다.

회계업계의 한 관계자는 “지금 문제를 방치했다가 내년 초 결산 시즌에 자칫 ‘회계 감사 대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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