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성포럼]"어느 순간만 참아 넘겨라"

정희선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원장 인터뷰
"실력이 있으면 유리천장 뚫린다"
진정성 있는 인간관계에 주력..배려와 포용의 리더십
  • 등록 2012-09-24 오전 8:20:00

    수정 2012-09-24 오전 9:10:05

정희선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원장 (사진=김정욱 기자 98luke@)


[이데일리 권소현 기자] 우리나라 과학수사는 세계적인 수준이다. 태국 푸켓에 쓰나미가 덮쳤을 때 유전자 대조로 자국민 신원을 모두 확인한 국가는 한국이 유일했고, 범죄 현장에서 채취한 혈흔이나 머리카락을 통해 오차범위 60억분의 1 내에서 DNA를 찾아낸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이 오차는 100만분의 1 수준이었다. 과학수사 수준을 이 정도로 끌어올린 여성이 있으니, 바로 여성 최초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을 지낸 정희선 씨다.

한때 국과수는 여성에게 벽이 높은 곳이었다. 사연 많은 시신이 부검을 위해 쉼 없이 들어오고 미스테리한 사건에서 자그마한 실마리라도 찾기 위해 현장을 샅샅이 훑어야 하며, 수만 가지 약물을 테스트하고 분석해 사인을 알아내는 그야말로 고되고 험한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어떤 곳보다 여성들의 기여도가 높은 곳이 됐다. 정 전 원장이 처음 국과수에 들어갔던 1978년 3명에 불과했던 여성은 원장 퇴임할 때쯤 43명으로 늘었다.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꼼꼼함으로 과학수사의 수준을 한층 높였다는 평가다.

앞만 보고 달렸다

국과수는 전문분야라 상대적으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적었지만 정 전 원장도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은 유리천장에 부딪혀본 경험이 있다. 누가 봐도 정 전 원장이 능력이나 경력 면에서 승진할 차례였지만 다음 순서였던 남자 동료가 먼저 승진하는 억울한 상황을 두 차례나 겪었던 것. 욱하는 마음에 사표를 던질까 생각도 했지만 몰려드는 일에 정신없어서 그만둘 시간조차 없었다고 털어놓는다.

승진 기회는 놓쳤지만 대신 얻은 것도 많았다. 승진 탈락을 같이 아쉬워해 주는 동료들의 배려와 이해, 그리고 외국 연구원으로 유학갈 기회였다.

정 전 원장은 “어느 순간만 참아 넘기면 기회가 오더라”라며 “두 번 미끄러지고 결국 승진한 이후에는 과장, 부장, 원장까지 고속 승진을 했다”고 말했다.

그 옛날 여성 직원들에게 흔히 떨어졌던 커피 심부름에 대한 정 전 원장의 대응도 프로다웠다. 이왕 할 것이라면 더 적극적으로 하자는 생각에 국과수 내에서 커피 잘 타기로 유명한 동료에게 방법을 전수받기까지 했다. 당시 커피 심부름을 시켰던 상사 중 한 명이 유영찬 전 국과수 소장(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으로 훗날 정 전 원장의 남편이 됐다.

[사진=김정욱 기자 98luke@]
◇포용하고 보듬어라


정 전 원장이 사회생활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인간관계다. 술 마시고 접대하면서 만든 인위적인 관계가 아니라, 진심을 담아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만들어진 관계다. 그는 큰 선물을 하진 않는다. 대신 누굴 만날 때 초콜릿 선물을 자주 하는 편이다.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는 직원들을 모아 작은 케이크 하나 사 들고 옛 국과수 선배들에게 인사를 다니기도 했다. 이렇게 세심하게 챙긴 것이 결국 탄탄한 인간관계의 근간이 됐다.

정 전 원장은 “관계 설정이 잘 돼 있으면 어떤 일을 추진할 때 주변에서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몰려든다”며 “이 같은 도움 덕분에 업무에서 성과가 나고 그 성과가 쌓여서 결국 원장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정 전 원장이 제시한 또 하나의 팁은 기업이나 기관의 수장에게 잘 보일 생각 하지 말고 바로 윗 상사에게 인정받으라는 것이다. 그 평가가 자연스럽게 조직 내에 알려지기 때문이다.

그는 국과수 여성 후배들에게 소중한 멘토다. 여성 원장이 탄생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여성 직원들에게 목표와 꿈을 제공했을 터.

덕분에 현재 국과수에는 여의사가 5명이나 된다. 법의학과장도 여성이 맡고 있다. 정 전 원장이 국과수의 여성 후배들을 특히 자랑스러워하는 부분은 남성 못지않게 자긍심과 의협심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여의사들에게 “의과대학을 나와서 돈 잘 버는 개업의의 길을 걷거나 대학에 남아 교수가 될 수도 있는데 왜 월급이 절반 정도 밖에 안 되는 험한 국과수에 들어왔느냐”고 물으면 “국가 안전에 기여할 수 있는 보람된 일을 하고 싶어서”라는 답이 돌아올 때 반갑다고 한다.

지난 7월 국과수 원장에서 퇴임한 정 전 원장은 이제 후배 육성에 적극 나서려 한다. 특히 대학에 과학수사 과정을 두어 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하고, 이를 아시아 과학수사 교육기관 거점으로 키워 그동안 약했던 아시아 지역의 과학수사 수준을 높이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She is..

숙명여자대학교 약학과를 졸업하고 1978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입사해 여성 최초 과장, 부장을 거쳐 2008년 국과수 53년 역사상 첫 여성 원장에 올랐다. 올해 34년간의 국과수 근무를 마치고 퇴임했다. 국내 최초로 소변에서 필로폰 성분을 검출하는 시험법과 모근을 이용한 필로폰 검사방법을 개발했고 서래마을 영아 유기사건, 석해균 선장을 쏜 범인, 연쇄살인범 강호순, 유영철, 김길태 사건 등 미제로 남을 뻔한 여러 사건을 해결했다. 특히 그룹 듀스의 멤버인 김성재 사망 원인이 동물마취제였다는 점을 밝혀낸 사건은 유명하다.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국제법독성학회 회장에 뽑힐 정도로 해외에서도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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