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치선 클래식평론가] 뮌헨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11월 2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선곡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제5번 황제’와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은 클래식 명곡 가운데서도 특히 사랑받는 곡이지만 작품의 개성이 많이 다른 탓에 한 무대에 올리는 일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현재 세계서 가장 주목받는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구스타프 말러가 객원지휘자로 나서 자신의 ‘교향곡 제4번, 제8번’을 초연한 것으로 유명한 뮌헨필하모닉, 최근 피아노협주곡을 공부하고 있다는 칠순의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함께 연주를 한다니 이 조합 또한 평생 쉽게 만나기 힘든 것이어서 관심과 기대가 대단히 컸다.
공연시작과 함께 백건우는 1악장에서 화려한 카덴차 도입부를 지나면서 웅장하고 화려한 울림을 만들어냈고, 2악장에서는 평생을 연주자로 살아온 피아니스트가 보여줄 수 있는 여유와 깊이, 섬세함과 여운을 담은 연주를 들려줬다. 3악장에서는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서로 경쟁하면서 힘 있게 질주해 나가며 협주곡 특유의 묘미와 감동을 느끼게 해줬다. 뮌헨필하모닉과 백건우는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고, 훌륭한 오케스트라가 협연자에게 얼마나 많은 자유를 줄 수 있는지 또 연주자를 얼마나 빛나게 해줄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줬다.
차이콥스키의 마지막 교향곡인 ‘비창’은 공연 전반부에 베토벤을 연주한 오케스트라가 맞나 싶을 만큼 게르기예프가 이끌어내는 오케스트라의 음색과 음질이 크게 변화했다. 1악장의 음악적 호흡은 더 깊고 길었으며 뿜어내는 에너지는 실로 압권이었다. 또 2·3악장에서 보여준 음악적 정서의 다양함과 표현의 스펙트럼은 음악을 격렬하게 움직이고 잠재우고 흘려보내면서 청중에게 단 1초도 다른 생각을 할 짬을 허락하지 않았다.
모든 연주가 끝난 뒤 1분이 넘는 침묵이 이어졌다. 게르기예프와 오케스트라, 청중이 모두 교감하고 호흡하고 감동하는 완전한 몰입의 경지를 경험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