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원화는 주요 선진국 화폐 단위보다 1000단위가 높다. 지난 2003년 당시 박승 한국은행 총재가 원화 단위에서 1000단위를 떼 선진국 화폐 단위 수준으로 조정하려는 화폐개혁을 추진했지만 인플레이션 등을 우려한 정부와 국회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됐다. 이러한 화폐개혁 논의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지난달 17일 한은을 대상으로 한 국정감사에서 이주열 한은 총재가 `국민적 공감대`를 전제한 후 “화폐개혁 필요성에 공감한다”고 밝히면서다.
미완의 화폐개혁
화폐단위 하향조정 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경제규모를 표기하는 화폐단위에 ‘경(京)’ 단위가 등장하는 등 화폐단위 인플레이션 우려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대미 달러 환율이 네 자리 수가 넘어가면서 ‘후진국’ 이미지가 짙어진다는 우려도 작용했다.
10환을 1원으로 화폐단위를 바꾼 1962년 이후 지금까지 국민소득은 2000배, 물가는 50배 넘게 상승했다. 집값이 ‘억(億)’ 단위로 뛰면서 부동산 거래금액도 9자리가 넘어갔다. 반면 10원짜리 동전 등 낮은 가치의 화폐는 잘 쓰이지도 않는다. 회계 수치상의 편리, 화폐 통용과 관리의 효율성 제고 등을 위한 화폐제도 개혁 필요성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1달러당 환율이 1000단위가 넘어가는 국가도 한국이 유일하다. 원화 가치가 낮게 비치면서 우리 경제에 대한 신뢰도 하락 우려도 나온다.
12년 전 박승 전 한은 총재는 발권국, 조사국, 금융결제국 인력 등을 꾸려 ‘화폐제도개혁 추진팀’을 만들었다. 특히 주목한 것은 유로화였다. 1990년대 말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 지역 국가들은 유럽연합(EU)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자국 통화를 버리고 유로화를 채택하는 화폐개혁 과정을 거쳤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유로화는 달러화에 이어 국제거래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결제통화가 됐다.
그러나 화폐단위 하향 조정에는 새 화폐 제조, 컴퓨터 시스템 변경 등 비용이 발생한다. 신권과 구권을 바꾸는 과정에서 사회적 혼란도 뒤따른다. 무엇보다 물가 상승이 가장 큰 우려다. 예를 들어 1000만원짜리 자동차가 1만원이 된다고 할때 1000만원일 때는 10% 상승할 경우 100만원이 올라 부담이 크지만, 1만원에서 10% 상승은 1000원 밖에 되지 않아 가격 상승을 크게 느끼지 못한다. 그러면서 조금씩 절상이 계속되고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화폐개혁 과도기 동안 불안이 확산하면 투자자들은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부동산으로 몰리고 부동산 가격 폭등이 야기될 수 있다.
박승 전 총재 “단기적 충격과 장기적 필요성 사이 결단 필요”
화폐개혁을 주도했던 박 전 총재는 이데일리와의 통화에서 “현 총재에게 부담을 줄까 우려된다”면서도 “화폐개혁은 결국은 해야 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화폐개혁은 단기적으로는 불편과 충격이 있어 어떤 정권도 쉽게 하지 않았던 일이지만, 언제까지 미뤄서는 안 되는 일”이라며 “(화폐개혁을)지금 안 해도 되지만, (궁극적으로) 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문제이고, 하려면 차라리 빨리하는게 좋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노무현 정권에서도 단기적 충격(부동산 가격 상승 등) 때문에 못했지만 장기적으로는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며 “결국 정부가 단기적 충격과 장기적 필요성 사이에서 결정해야 하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박 전 총재는 화폐단위 하향조정 이후 물가상승 우려 등 일각의 지적에 대해서도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부수적인 문제”라며 “ 터키도 2005년 100만대1로 화폐개혁을 한 이후 물가가 1% 정도 오르는 일시적인 인플레이션이 있었지만 단기적이고 크지 않았다고 본다”고 말했다. 또한 “자금이 해외로 유출된다거나 (부동산 등) 안전자산으로 (과도하게) 흘러들어 갈 수도 있다는 우려는 과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 전 총재는 “화폐교체로 인해 현금자동입출금기(ATM) 기기 교체 등 새로 투자해야 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경기활성화에 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며 화폐개혁 과정에서의 경기부양 효과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