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제공] 2004년은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노무현 대통령)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한나라당 최병렬 대표)는 여야 수뇌부의 설전서부터 정치권의 공방 등으로 일년 내내 말싸움이 계속된 한 해였다. 사회·경제적으론 IMF 이후 최고의 불경기 체감지수를 반영한 ‘삼팔선·사오정·오륙도’ 등의 신조어가 급속히 확산됐다.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는 위기감이 든다”=노무현 대통령은 5월 “대통령직을 못해 먹겠다는 위기감이 든다”고 말해 국민들을 어리둥절케 했다. 이어 10월에는 “(측근비리 기사에) 눈앞이 캄캄했다 ”며 ‘재신임 투표’를 선언했고, 12월에는 “불법 대선자금이 한나라당의 10분의 1 을 넘으면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시민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 “민주당 찍으면 한나라당 도와준다” 는 말로, 다 끝난 줄 알았던 올해의 ‘어록’에 몇 대목을 추가시켰다.
노 대통령은 취임 초 검사들과의 대화에서는 “이쯤하면 막하자는 것이죠?” 라며 ‘막말’ 퍼레이드의 신호탄을 쐈고, 뒤이어 “청탁하다 걸리면 패가망신시키겠다” , ‘쪽수’, ‘통박’, ‘개xx들’들이 나왔다. 노 대통령은 “말 실수 몇 마디 했다고 1년 내내 꼬투리를 잡는다”고 항변했지만,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하락요인 1위는 ‘부적절한 언행’이었다.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한나라당 최병렬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 이 사람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인가, 나는 솔직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정”이라고 말해, 여권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측근비리 특검법을 거부하자 그는 ‘나라를 구하겠습니다’라는 현수막 밑에서 단식을 했다.
한나라당은 ‘차떼기’에 짓눌렸다. 최 대표는 김윤환 전 의원 상가에서 “ 차떼기 때문에 망했어, 망했어”라며 탄식했고, 이회창(李會昌) 전 총재는 기자회견에서 “학처럼 살고 싶었는데 흙탕물에 빠졌다” 며 눈시울을 붉혔다.
민주당 조순형 대표는 “총선 승리로 빼앗긴 정권 절반을 되찾겠다” 고 했고, 추미애 의원은 “노 대통령은 우리 가슴에 분열과 배신의 대못을 박았다” 고 했다.
분당을 주도했던 열린우리당 ‘천·신·정’ (천정배·신기남·정동영 의원)도 유행어가 됐다. 천정배 의원은 11월 “이것이 전형적인 노빠당 (노무현 오빠당) 아니냐”며 쓴소리를 했고, 정대철 의원은 열린우리당으로 옮긴 뒤 측근에게 “나 사기당한 것 같아…” 라고 했다. 김원기 의장은 11월 “열린우리당에 돈키호테과가 너무 많다” 고 했다.
◆“사설(私設) 부통령이 생겼다”=노 대통령의 장수천 의혹과 최도술 전 청와대 비서관 등 측근 비리는 야당의 공격대상 1호였다. 민주당 김옥두 의원은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에 대해 “이기붕, 차지철 같은 사설 부통령이 생겼다”고 했다. 강 회장은 9월 국감에 나와 “국감이 아니라 코미디” 라고 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지만, 연말을 구치소에서 맞았다.
민주당 유종필 대변인은 “노 캠프 참모들이 대선 전후 돈벼락 을 맞았다. 최도술씨는 아예 바다 속에 들어가서 짠물을 먹었다”며 쏘아붙였다.
‘검찰 정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검찰은 힘이 셌다. 굿모닝시티 사건에 연루된 정대철 의원이 “우리나라는 검찰 공화국 ”이라고 하고 유인태 청와대 정무수석은 “요즘 검찰이 간이 부었다” 고 하자, 서울지검 채동욱 특수2부장은 “우리 간은 건강하다” 고 맞받았다.
‘대한민국 최고실세’라고 불린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은 “조사받는 사람은 말을 많이하고 조사하는 사람들은 말을 못하는 시대”라고 했고, 송광수 검찰총장은 “ 검찰독립이 되려면 검찰총장 5명은 옷을 벗어야 한다 . 내가 첫번째 사람이 될 각오가 돼 있다”고 했다.
노 대통령도 “안 부장 때문에 요즘 죽을 맛” 이라고 했지만, 야당은 편파수사를 항의했다. ‘강효리’ 라는 별명을 얻은 강금실 법무장관은 측근비리 특검법 통과과정을 보면서 혼잣 말로 “코미디야, 코미디”라고 했고, “송두율이 김철수라고 한들 처벌할 수 있겠냐”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추다르크’로 불린 추미애 의원은 “치마가 폭이 넓으냐, 바지가 폭이 넓으냐” 며 여성 리더십을 강조했다.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6월 법정에서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는 조지훈의 시 낙화(落花)를 인용해 심경을 밝혔다. 송두율씨가 10월 “균형감 있는 ‘경계인’ 으로 살기 위해 노동당에서 탈당하고자 한다”고 말해, ‘경계인’이 유행했다. 노 대통령도 10월 국회연설에서 “나는 호남인도, 영남인도 아니다. 경계 위에 서서 공격을 받고 있다” 고 하자, 민주당 유종필 대변인은 “요즘은 경계인을 경계해야 된다 ”고 했다.
취임 기자회견에서 “특종을 하려면 쓰레기통을 뒤져라” 는 말로 포문을 열었던 이창동 문화부 장관은 며칠 후 “공격받고 힘들어지니 장관할 만하다. 의욕이 생긴다”며 언론을 조롱했다. 고건 국무총리는 8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노 대통령과 코드가 맞냐는 질문에 “코드는 모르겠고 사이클은 맞춰가고 있다” 고 했다.
최기문 경찰청장은 6월 “힘을 앞세운 민원이 봇물처럼 쏟아져 ‘떼한민국’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했고, 김종규 부안군수는 “돌과 계란을 던져 화가 풀린다면 던져라”라고 했다.
최낙정 전 해수부장관은 “태풍 때 대통령이 오페라보면 안 되나” , “몸을 던져서라도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며 충성심을 유감없이 발휘하다, 잇단 실언으로 낙마했다. 8월 자살한 정몽헌 회장은 유서에서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에게 “당신, 너무 자주 윙크하는 버릇 고치세요” 라며 애정을 표했고, 김 사장은 “이제 나는 김윤규가 아니라 정윤규 다”라고 했다.
◆“전 재산 29만원뿐”=전두환 전 대통령은 4월 법정에서 “내 재산은 29만원뿐”이라며 추징금을 낼 수 없다고 버텼고, 신우진 판사는 “무슨 돈으로 골프 치고 해외여행 다니느냐”고 핀잔을 줬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최병렬 대표의 단식농성장에서 “나도 23일간 단식을 해봤지만 굶으면 죽는 것은 확실하다 ”고 말해, ‘역시 YS’라는 평가를 받았다.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경기침체와 조기 명퇴 바람은 삼팔선(38세 명퇴), 사오정(45세 정년), 오륙도(56세까지 남아있으면 도둑)같은 우울한 신조어(新造語)를 탄생시켰다. 청년실업 사태는 이 사전에 ‘이태백 (이십대 태반이 백수)’을 추가시켰다.
인터넷에는 ‘ 얼짱 (얼굴짱)’에 이어 ‘누드 열풍’으로 ‘몸짱’ 까지 등장했다. ‘신세대 사극’인 ‘다모’의 인기로 ‘다모 폐인’ 들이 생겼고, “아프냐? 나도 아프다” 라는 말 한 마디에 네티즌은 열광했다.
영화 ‘스캔들’의 광고 문구인 ‘통(通)하였느냐?” 는 노 대통령 측근 비리를 공격하는 야당에 의해 패러디됐고, 영화 ‘황산벌’의 ‘거시기하다’ 도 다용도로 사용됐다. 영화 ‘살인의 추억’ 이 흥행에 성공하자, 개그맨 정준하는 ‘안 좋은 추억’ , ‘두 번 죽이는 일’ 등의 유행어를 히트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