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전문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만든 기금위 산하 전문위원회 역시 노동계와 경영계 추천으로 구성돼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표 대결의 장으로 변질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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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전문가를 안 믿는 거다.” 박창균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조정실장은 국민연금의 전문성 문제를 이렇게 요약했다. 자산운용보다는 복지 전문가인 복지부 장관이 기금위원장을 맡고 관계 부처 차관이 당연직으로 참여하는 기금위가 국민연금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점을 지적한 것이다.
국민연금법에 따르면 기금위는 복지부 장관이 위원장을 맡고 기획재정부·농림축산식품부·산업통상자원부·고용노동부 차관,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등 5명이 당연직 위원으로 참석하도록 돼 있다. 기금위가 국민연금의 수익률은 물론 자산배분 계획 등을 총괄하는 것을 고려하면 적절치 않은 구성이라는 비판이다.
사용자·근로자 단체 추천 위원 각 3명, 지역가입자 대표 위원 6명, 전문가 2명 등도 포함되지만 추천 단체의 이해를 대변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박 실장은 “기금운용을 잘못해서 기금이 줄어들면 후세대가 세금을 더 내서 메꾸는 구조”라며 “쉽게 말하면 노동조합이나 기업, 현재의 정부는 기금 운용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삼성전자(005930)의 의결권 행사 방향을 둘러싼 기금운용본부(본부)의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수탁위)의 갈등은, 전문성을 보충하기 위해 설치한 기금위 산하 전문위 역시 완벽한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최근 기금운용본부장이 이끄는 본부 투자위원회가 찬성을 권고한 사안을 두고 수탁위 일부 위원이 이의를 제기하며 사퇴 의사까지 표명했다.
수탁위는 기금위의 전문성을 보완하기 위해 설치된 산하 기구다. 기금위가 전문성이 부족한 만큼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수탁위·투자정책전문위원회·위험관리성과보상위원회를 설치해 이를 보완하겠다는 취지다. 문제는 산하 전문위 역시 노동자·경영자 단체와 지역가입자 단체가 3명씩 추천하도록 돼 있는 구조라는 것이다.
각 단체가 1명의 상근 전문위원과 2명의 비상근 전문위원을 추천하는데 특히 비상근 위원의 경우 지위에 비해 역할이 과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탁위는 본부 투자위원회가 결정하기 곤란하다고 판단한 사안을 좀 더 심도 깊게 논의하는 역할이지만, 노동계와 경영계가 3명씩을 나눠 가진 상황에서 지역가입자 위원의 표심에 따라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표 대결의 장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는 “각계 대표성을 반영하는 과정에서 인적 구성 자체가 의사 결정이 돼 버린다”며 “연금의 장기적인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선임해주는 곳의 입장을 대표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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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자본시장에서 국민연금의 중요성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 국민연금의 지난해 말 자산은 833조7280억원으로 이 가운데 국내주식 비중은 21.2%(176조6960억원)에 달한다. 2018년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이후 책임투자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의결권 행사 역할도 중요해지고 있다. 국민연금이 홈페이지를 통해 공시한 주주권 행사 내역은 지난 2017년 625건, 2018년 656건, 2019년 628건 등으로 비슷한 수준이었다가 지난해에는 737건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전문성이 충분치 않은 구조여서 의결권 행사 역시 기준이 구체적인 경우에만 한정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자본연 리포트에 따르면 2019년 국민연금의 반대의결권 행사 126건 가운데 비교적 요건이 상세한 이사 보수가 36건으로 상당수를 차지했다.
전문가들은 기금위를 전문성을 담보한 이들로 채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지적한다. 류 대표는 “복지부 장관이나 당연직 차관들 같은 사람들의 비율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박 실장은 “전문성을 갖춘 본부의 결정권을 확대해야 한다”며 “대표성이 문제가 된다면 이사를 뽑는 과정에서 다양한 단체로부터 추천을 받는 식으로 보완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