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위험한 건배사의 계절

  • 등록 2017-11-28 오전 6:00:00

    수정 2017-11-28 오후 10:10:16

[이데일리 정태선 기자] “성기~발기!” 다소 도발적인 건배사에 25명 남짓 모인 저녁 송년모임에는 순간 정적이 흘렀다. 1초 남짓이나 됐을까? 원하지 않았지만 그 자리의 유일한 XX염색체였터라 주변에서 눈치를 살펴야하는 주인공이 돼버렸다.

“성공을 기원합니다, 발전을 기원합니다. 좋은 뜻을 담았습니다. 성기하면 발기로 답해주세요~.” 좌중의 요란한 웃음소리와 함께 짧은 순간의 정적은 금새 깨져버렸다. “산전수전 다 겪은 우리 정 기자는 다 이해합니다. 하하하~” 주변의 안심서비스가 더해졌다.

어지러운 시국에 용감한 건배사를 잘 들었다며 40대 중반 여자의 눈치를 슬쩍 봐주는 이들에게 감사(?)해야하는 것인지, 혹은 ‘너나잘해’(너와 나의 잘나가는 새해를 위하여)로 호기롭게 응수해 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할 틈도 주지 않고 술잔은 또 다른 건배사를 향해 우측으로 재빠르게 돌고 있었다.

‘욕하면서 닮는다’는 옛말대로 평소 남자 상사들은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할까, 화를 냈던 그 지점에서 그들과 똑같은 말투로 후배들을 대하는 스스로를 발견하면서 웃픈 처지다. 사회생활을 버텨내며 아저씨들과 동질화지수가 100을 기준으로 70~80쯤은 되다보니 성적인 유머를 곁들이며 친밀감을 표시하는 이런 자리가 그리 낯설지 않다.

사실 건배사를 갑자기 제안을 받으면 난감할 때가 많다. 한 취업포털에서 직장인들 800여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조사한 결과를 봐도 회식 자리에서 건배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이 절반(51%)을 넘었을 정도. 말 주변이 좋거나 사전 준비를 안 해 놓으면 웬만한 순발력을 갖지 않고서는 버벅거리기 일쑤다.

그럼에도 요즘 유행대로 표현하면 앞의 사례는 ‘스튜핏!’, 실패한 건배사다. 경고장을 집어보는 이유는 ‘불쾌감’보다는 ‘불안감’이 커서다. 국내에서는 한샘에 이어 현대카드까지 성폭행 등의 논란으로 직장내 성문화가 핫이슈였다.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 직장내 성희롱 문화를 우려하면서 “피해자가 피해를 입고도 문제 제기를 못 하는 분위기나 문화부터 시급히 바로잡아야 한다”며 “그 점에 있어서 기관장·부서장의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바다 건너 미국 헐리우드에서는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에 대한 성폭력 피해자들의 폭로가 이어지면서 ‘미투(me too “나도 당했다”) 캠페인’이 한창 확산되고 있다. 이런 기류를 반영하듯 미국의 일부 대형투자사들은 성희롱 문제 등으로 고소 등 사건이 벌어진 기업들을 투자 대상에서 제외할 정도다. 성희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방치하는 회사들은 능력 있는 직원들을 유지하기 어렵고, 대외적으로도 이미지가 하락해 매출과 순익이 감소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반면 성희롱 문제가 적고, 성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있는 기업들은 주가가 더 안정적이고 높은 수익률을 냈다고 한다.

연말연시 술자리와 건배사의 계절이 다시 찾아왔다. 건배사는 우리나라의 회식자리서 ‘브레이크 디 아이스’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초반 어색한 분위기를 잡아주고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모인 사람들의 기분을 부드럽게 풀어주고, 서로 인사를 주고 받으면서 얼굴이나 이름을 기억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한다. 한 조사업체가 발표한 지난해 송년회 건배사 추천 1위는 ‘박보검’(박수를 보냅니다 올 한 해, 겁나 수고한 당신께)이었다. 평범하지만 ‘위하여’가 2위, 시대를 반영한 건배사 최순실(최대한 마시자 순순히 마시자 실려갈 때까지 마시자)은 3위에 올랐다. 소화제(소통과 화합이 제일이다)와 아우성(아름다운 우리의 성공을 위하여)이 그 뒤를 이었다. 좋은 평판을 쌓는 데는 20년이 걸리지만, 평판을 망가뜨리는데는 5분이면 충분하다. 워렌 버핏의 말을 매일 한번씩 되뇌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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