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는 "주말은 가족과 함께 보내고 평일 저녁 시간을 이용해 친구들과 골프를 즐긴다"면서 "특히 여름철에는 폭염을 피할 수 있고 그린피(green fee·코스사용료)도 싸다"고 말했다. 이곳의 주중 야간 시간대 그린피는 14만9000원에서 15만9000원 정도다. 주중 낮 시간대보다는 1만원, 주말 낮 시간에 비하면 7만~8만원 저렴하다. 이날 낮 기온은 30도를 오르내렸지만 김씨가 라운드를 하던 무렵에는 21도로 선선했다.
이 골프장은 마지막 티 오프(tee off·골프 라운드의 첫 시작) 시간이 오후 7시30분이다. 이때 시작한 사람들은 자정을 넘긴 12시30분쯤 18홀을 모두 마치게 된다. 스카이72 골프클럽의 권순창(31) 매니저는 "7~8월 혹서기에는 주간보다 야간 예약이 먼저 마감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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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낮 삼아 활동하는 '호모 나이트쿠스(homo nightcus)'가 부쩍 늘고 있다. 밤을 뜻하는 나이트(night)에 인간을 뜻하는 접미사 'cus'를 붙인 신조어다. 국립국어원 신조어 사전에도 오른 단어다. '올빼미족'과 비슷한 '심야형·밤샘형 인간'을 말한다.
14일 오전 1시30분 서울 한강시민공원 잠원지구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ON'. 야심한 시각이지만 다섯 가족이 '심야 파스타'를 즐기고 있었다. 이난희(35·주부)씨는 "목포에서 올라온 조카에게 서울 구경을 시켜주다 야식을 먹으러 왔다"면서 "늦은 시간의 외식을 즐기는 편"이라고 말했다.
같은 시각 서초구 반포동의 일본요리 전문점 '화'에는 23개 테이블 중 6개가 손님들로 차 있었다. 김우진(30) 매니저는 "오후 7시대 회식 손님이 지나고 자정부터 새벽 4시 사이에 찾는 '2차 손님'들이 꽤 된다"고 말했다. 이날 오전 2시30분 영등포구 여의도동의 커피 전문점, 오전 3시 종로 2가의 햄버거 체인점도 혼자 책을 읽거나 노트북 화면으로 영화를 보면서 음료를 즐기는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낮 시간을 내기 어려운 직장인들의 '야간 번개'도 인기다. 심야에는 확실하게 모여서 정보를 교환하거나 친목을 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성훈(37·학원강사)씨는 매주 토요일 자정 인천 효성동의 한 셀프 세차장을 찾는다. 자동차동호회 회원들과 손 세차를 하고 '애마'에 대한 정보도 나눈다. 이씨는 "동틀 때까지 모임이 이어지기도 하지만 휴일이라 부담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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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 헬스클럽도 호황이다. 12일 오전 1시 서울 신촌역 인근의 비엠스포츠클럽은 운동 삼매경에 빠진 20~30대 15명의 열기로 후끈했다. 근력 운동을 하던 이승현(29·연세대 신소재공학부 대학원)씨는 "연구실 작업이 늦게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지만 오전 2~3시라도 이곳에 들러 하루치 운동을 빠뜨리지 않는다"고 했다. 홍대 앞에서 액세서리 가게를 운영하는 박일용(29)씨는 "가게 문을 닫은 뒤에도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좋다"고 말했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 '아이리스 휘트니스클럽'의 최윤석(28) 트레이너는 "자정 넘어 몇 시까지 영업하는지에 대한 문의가 끊이질 않아 개장 한 달 만에 24시간 풀 가동 체제로 바꿨다"면서 "야근이 많은 직장인이나 늦은 시간 가게 문을 닫는 자영업자들이 주고객층"이라고 했다.
호모 나이트쿠스 현상을 매출 증가로 연결하기 위해 유통업체들은 다양한 전략을 내놓고 있다. 전체 점포 112곳 중 50여곳을 24시간 운영하는 홈플러스는 최근 24곳의 영업시간을 늘렸다. 야간 고객에게 생필품 50여가지를 최대 50%까지 할인해 주는 전략도 구사한다. 옥션이나 CJ몰 같은 인터넷쇼핑몰은 야간 시간대, 특정 상품에 대해 할인 쿠폰을 증정한다.
13일 오전 1시 홈플러스 동대문점을 찾은 안무현(29)씨 부부는 "열흘에 한 번 정도 나와 쇼핑과 심야 데이트를 즐긴다"고 말했다. 이날 새벽 두 딸과 함께 동대문 쇼핑센터를 찾은 임태자(44)씨는 "평소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이 적었는데, 여유 있게 쇼핑하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일본인 관광객 고마쓰 히로코(34)씨는 "야간 쇼핑은 일본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라면서 "역동적이고 활기찬 한국 문화의 하나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의료 전문가들은 야행성 생활을 계속하면 건강을 해칠 수 있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홍일희 서울수면클리닉 원장(47)은 "밤낮이 뒤바뀐 생활을 이어지면 만성피로에 시달리기 쉽다"면서 "성격이 날카로워지고 기억력과 집중력이 떨어지며 고혈압과 부정맥 발생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했다. 정해진 시각에 잠자리에 들고 수면시간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평균 노동 시간이 길어지면서 여가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잠을 줄여야 하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면서 "세상이 '24시간 논스톱 사회'로 변해가면서 호모 나이트쿠스도 점차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