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쯤 숲은 연둣빛 세상으로 변했을 테지. 그런 생각으로 족은노꼬메오름에 갔다. 그러나 오름에는 봄이 더디게 오고 있었다. 겨울을 떨쳐내지 못한 숲은 이제야 깨어나고 있었다.
촌장과 나는 짧은 길도 긴 시간을 들여 걷는다. 숲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몸속으로 밀려드는 공기도 상큼한 초록이다. 숲에 들 때면 내가 호흡을 하며 살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꽃냄새와 더덕 향기에 코가 벌름대고, 발에 밟혀 사그락 대는 화산송이와 삼나무 숲이 부르는 바람의 노래에 귀가 즐겁다. 나는 천천히 걸으면서 숲에 마음을 디밀어 보고,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며 숲에 스며든다.
촌장과 유쾌한 대화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 순간 유수암 목장이 나왔다. 그때야 길을 잘못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족은노꼬메오름은 갈림길이 엄청 많은데 안내 표지판은 부족하다. 오름을 왔으니 오르막길을 걸어야 하는데, 내리막의 유혹에 길을 잃은 거였다. 한참을 되돌아와서 오름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았다. 족은노꼬메오름은 평범한 오름이 아니다. 초입만 평지이고 올라가기 시작하면 경사가 꽤 험하다. 엉뚱한 길로 가지 않는다면 말이다.
“노루 녀석들은 모두 어디 간 거야? 가끔 뱀도 몇 마리 기어 다니면 좋을 텐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활엽수들이 잎을 떨군 채 서 있고, 그 밑 세상은 조릿대들이 장악하고 있다. 나는 항상 겨울의 숲을 걸을 때면 봄의 숲을 생각한다. 봄이 되면 활엽수의 마른 가지에 물이 오르고, 일시에 깨어나는 연둣빛 새싹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겨울의 흙길에서 봄의 흙냄새를 맡으며 터벅터벅 걷는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에 오소리 서식지라는 안내 표지판이 있다. 허물어진 듯한 저 굴이 오소리 굴이다. 입구의 흙이 촉촉한 걸 보니 조금 전까지도 오소리가 드나든 게 분명했다. 오소리는 비탈지고 배수가 잘되는 곳에 굴을 판다. 중심 굴 주변에 작은 굴들을 그물 모양으로 파서 여러 세대가 모여 산다. 동면을 위한 겨울 굴과 번식을 위한 여름 굴을 구별해서 파고, 굴 청소도 자주 한다고 한다. 나보다 청결한 녀석이다.
나무들이 죽었다는 건 사람의 관점일 뿐이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시간 속에서 허물어져 가고 있지 않은가? 저 나무들은 온몸으로 우뚝 서서 한 생을 살았고, 시간이 되어 다른 생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제 저들은 숲에 누워서 이끼와 버섯에게 몸을 내어주고, 개미에게 안락한 집을 제공할 것이다. 그렇게 또 오랜 세월이 흐르면 흙으로 돌아갔다가 다른 모습으로 숲에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숲에는 낡아가는 것도 죽어가는 것도 없다. 숲의 모든 것이 생명의 순환이 아닐까?
이곳 초지는 `효리네 민박`프로그램에서 이효리와 아이유가 촬영을 했던 곳이다. 유명세를 탄 덕분일까? 올라오는 젊은 남녀마다 내려가는 내게 촬영장소를 물었다. 삼나무와 전나무숲에 둘러싸인 초지에는 깔깔대며 뛰어다니는 어린 아이들이 보였고, 셀프 웨딩촬영을 하는 신부의 모습이 눈부셨다. 멋지게 차려입은 청춘들이 인생의 한 순간을 사진에 담고 있었다.
초지를 지나서 궷물오름에 올랐다. 높이 57m의 낮은 오름이다. 분화구 바위틈에서 샘물이 솟아나는데, 이 샘물을 궷물(괸물)이라고 부르는 대서 유래됐다. 궷물오름 정상에 서자 큰노꼬메오름이 무시무시한 자태로 솟구쳐 있다. 주차장에는 차량이 많지만 족은노꼬메오름 정상을 밟는 여행객이 별로 없었다. 오름이 험한 탓도 있을 거다. 하지만 험한 만큼 숲이 깊고 오르는 즐거움이 있다.
[여행 팁] ·경사가 꽤 가파른 오름이므로 트레킹화를 신고 올라가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