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60)씨는 지난 2월, 400만원 상당의 문화상품권으로 인터넷 쇼핑몰에서 물건을 사려고 했다. 그러나 이 상품권을 받아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씨가 1년 전에 구입한 업체에 전화로 항의하자, 그곳 직원들은 “우리는 상품권 인쇄만 맡았을 뿐”이라고 잡아뗐다. 이씨는 발행업체를 직접 찾아갔지만 사무실 문은 굳게 닫혔고 직원들은 온데간데 없었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난무하는 상품권, 급증하는 피해
상품권 발행과 유통이 난무하면서 소비자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발행업체가 증발해버려 휴지조각이 된 상품권, 구입 대상 상품의 유효기간이 지나버려 쓸모가 없어진 상품권, 홀로그램과 발행업체 로고 등을 가짜로 만든 유령 상품권뿐 아니라, 최근에는 상품권을 이용한 대출·투자 사기도 잇따르고 있다. 예컨대 인터넷을 이용해 ‘상품권 매입 후 3~6개월 뒤 다시 상품권을 가져오면 연20~30%의 이자와 원금을 돌려주겠다’는 식으로 투자금을 끌어 모은 뒤 잠적해버린다.
금융감독원 조성목 비제도금융조사팀장은 “이들 업체는 터무니없는 고수익을 약속하고 처음엔 이자를 꼬박꼬박 지급하다 투자금이 어느 정도 쌓이면 갖고 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또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신용카드로 상품권을 사도록 한 뒤, 그 자리에서 낮은 액수의 현금을 주고 상품권을 다시 사들이는 ‘상품권 깡’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법 폐지 이전인 1998년에 9200억원 규모였던 국내 상품권 시장은 2001년 5조원, 2004년 7조원, 2005년 8조원(경품용 상품권시장 제외)으로 급팽창하고 있다. 김치, 미용, 건강검진, 골프예약, 해병대극기훈련 상품권 등 종류도 3000종이 넘는다. 이처럼 상품권 시장이 커진 것은 은행 대출이나 회사채 발행이 어려운 사업자들이 현금 확보수단으로 상품권을 발행하는 경우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상품권 피해 대책은 걸음마 단계다. 현재 상품권 발행은 공정거래위원회의 상품권 표준약관과 재정경제부의 소비자 피해보상규정에 따르도록 돼 있다. 하지만 이런 규정이 강제 규제 수단이 아니어서 소비자들은 상품권 피해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정부 관계자는 “상품권 발행은 발행자와 소비자 간 계약이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며 “계약 불이행에 따른 분쟁은 소비자 보호제도, 민사상 구제제도를 통해 해결 가능하다”고 말했다.
한양대 법대 권대우 교수는 “소비자 입장에서 상품권은 일종의 선불지급 수단이기 때문에 발행업체가 파산할 경우 구제받을 방법이 전혀 없다”며 “상품권법을 비롯해 소비자의 피해를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