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갈수록, 나이 들수록 눈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한다. 지혜의 눈이 있는가 하면 마음의 눈도 있다. 김용옥 선생의 말씀을 따르면 ‘씹는 눈’도 가능하다. 젊은 사람들 표현으로는 ‘촉’이라고도 한다. 배움이란 결국 안목(眼目)을 키우는 일련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제 눈을 지니는 것’이야말로 목숨 받아 이승을 사는 자로서의 최대 소임이 아닌가 싶다.
일본 학자 야스토미 아유무(安富 步)가 쓴 ‘초역 논어(超譯 論語)’에는 공자의 그 유명한 언명,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를 제 눈으로 씹어 읽어낸 인상적인 구절이 있다. “뭔가를 배우는 일은 위험한 짓이다. 자기 감각을 팔아넘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우는 일을 자기 것으로 하려고 노력을 거듭하면 어느 때 문득 진짜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배우는 일을 자기 것으로 해서 감각을 되찾는다. 그것이 ‘익힌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정 기쁘지 아니한가.”
여기서 ‘초역’이야말로 김용옥 선생의 ‘씹는다’는 행위와 거의 같은 맥락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한 인간이 평생 갈고 닦은 ‘저만의 안목’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 초역이 아닐까 싶다.
남의 생각을 개입시키지 않고, 자신의 깨달음과 더불어 노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진미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씹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의 최종 목적지는 ‘나대로 잘 놀기’라 할 수 있다. 인생사를 안목의 관점에서 보면 열심히 연마해 ‘제 눈을 지니는 것’이 첫째요, 그렇게 닦은 안목으로 ‘두루 놀아보는 것’이 둘째다.
‘난세일기’의 부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을 되돌아본다’이다. 김용옥 선생은 이 시절을 ‘난세’라 규정하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 함께 씹자’고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이 교수와 종교인들의 시국선언으로 시작하는 까닭이다.
돌아보면 학문과 독서뿐 아니라 세상만사가 씹을 거리가 아닌 것이 없다. 길을 걷다가도, 산을 오르다가도, 박물관에서 유물을 보다가도, 자신만이 볼 수 있는 눈의 근육을 키우면 어느덧 남의 생각을 개입시키지 않고 혼자서 씹으며 놀게 된다. 오래 전해져 오늘에 통하는 문화유산의 근원이 바로 이 ‘함께 씹으며 놀기’다. 풍류라고도 부르고, 민족미학이라고도 하는 이 힘이야말로 난세 극복의 유구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