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배우, '미스 사이공' 英 투어 주연 '따다'

박영주, 지난달 12일 투이 역으로 첫 무대
두 번째 커버에서 첫 번째 커버로 승격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에서 뮤지컬배우로
"좋아하는 일이면 힘들어도 이겨낼 수 있어"
  • 등록 2018-05-01 오전 6:00:00

    수정 2018-05-01 오전 6:00:00

지난해 7월부터 시작한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영국투어에서 주인공 투이 역을 맡은 배우 박영주(오른쪽), 킴 역을 맡은 배우 김수하(사진=배우 박영주 제공).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지난달 12일(이하 현지시간) 영국 맨체스터의 팰리스 극장. 유명 뮤지컬 제작자 카메론 매킨토시의 대표작 중 하나인 ‘미스 사이공’ 영국 투어에 한국 뮤지컬배우 박영주(34)가 주인공 투이로 무대에 섰다. 그는 작년 7월부터 시작한 이번 투어 팀에 투이 역의 두 번째 커버 배우(주연의 대역)이자 앙상블로 함께하고 있다. 주연 배우와 첫 번째 커버 배우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뤄진 데뷔였지만 무명배우로 뮤지컬 꿈의 무대인 웨스트엔드에 도전해 이룬 값진 성과였다.

2일부터는 투이 역의 첫 번째 커버 배우로 승격해 투어를 이어간다. 투이 역의 배우 제랄드 산토스의 휴가 기간과 맞물려 2일부터 12일까지 10일간 총 14회에 걸쳐 투이 역으로 무대에 설 기회도 갖게 됐다. 최근 이메일로 만난 박영주는 “영어 발음부터 캐릭터 연구, 발성 등 약 1년 동안 나만의 투이를 만들어보려고 노력했다”며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절실하게 느꼈다”고 소감을 말했다.

‘미스 사이공’에 한국 배우가 출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4년 배우 이소정이 브로드웨이에서 주인공 킴 역을 맡아 화제가 됐다. 뮤지컬 스타 홍광호도 2014년 영국 웨스트엔드 25주년 프로덕션에서 투이 역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박영주의 이번 데뷔는 더욱 특별하다.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으로 연기 전공자가 아니었던 그가 오직 자신만의 노력으로 영국 무대에서 이뤄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배우 박영주(앞줄 왼쪽)지난달 12일(현지시간) 영국 맨체스터 팰리스 극장에서 열린 뮤지컬 ‘미스 사이공’에서 주인공 투이 역으로 첫 데뷔 무대를 가진 뒤 커튼콜을 하고 있다(사진=배우 박영주 제공).


박영주는 “주변 사람들은 내가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온 것이 아깝지 않은지, 후회하지 않는지 묻는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고등학교를 다니는 3년 동안 공부만 해 남들이 ‘최고’라고 말하는 대학에 입학했다. 그렇게 하면 ‘꿈’을 찾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에 불과했다. 그 무렵 국제구호활동 전문가 한비야의 강연을 듣고 뮤지컬배우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는 “‘내 심장을 뛰게 하는 일을 하라’는 한비야의 말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고민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뮤지컬배우를 선택하게 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2008년 교환학생으로 독일에 머물면서 본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뮤지컬배우의 꿈에 불을 지폈다. 이란 출신의 뮤지컬스타 라민 카림루의 열연에 반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2009년부터 뮤지컬배우가 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공연계에 뛰어들어 앙상블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배우들처럼 뮤지컬과 연기를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아 배움에 대한 열망이 컸다. 2016년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콘서바토리움의 뮤지컬과에 입학했다. 같은 해 9월 ‘미스 사이공’의 영국 투어 오디션에 참가했고 마침내 작년 7월 ‘미스 사이공’ 투어 팀에 합류하게 됐다.

늦깎이 배우지만 낙천적인 성격을 타고난 덕분에 불안함을 느끼는 일은 없었다. 박영주는 “(영국에 와서) 초반에는 실력이 너무 없어 오디션에서 굴욕을 많이 당했지만 그런 경험이 저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며 “한 공연을 마치고 다음 공연이 없을 때 오디션을 봐야 한다는 조급함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졌다”고 말했다. 또한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 자체를 대단한 일로 생각하는 게 나를 오히려 불안하게 만들 것 같다”면서 “나는 그냥 무명 뮤지컬 배우라고 생각하려 한다”고 겸손함을 보였다.

지난달 12일(현지시간) 영국 맨체스터 팰리스 극장에서 공연한 뮤지컬 ‘미스 사이공’ 캐스팅 보드. 투이 역 데뷔 무대를 가진 배우 박영주와 주인공 킴 역의 한국배우 김수하의 이름이 적혀 있다(사진=배우 박영주 제공).


‘미스 사이공’의 투이는 비운의 여인 킴을 비극으로 몰아가는 악역이다. 전체 등장 분량은 약 12분에 불과하지만 관객에게 남기는 인상은 강렬하다. 악역이다 보니 커튼콜 때 박수보다 야유를 받는 일이 많다. 박영주에게는 그마저도 큰 즐거움이다. 그는 “투이를 딱딱하고 단편적인 이미지가 아닌 다양한 감정을 보여줄 수 있는 인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투이를 향한 야유조차도 배우로서는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현재 ‘미스 사이공’의 영국 투어에는 박영주 외에도 김수하·전나영·칼 재석·솔베르그 등 한국인 또는 한국계 배우들이 활약하고 있다. 박영주는 내년 3월까지 투어를 함께 한다. 그는 “‘내가 그 일에 절실하고 절실한 만큼 노력하면 언젠가 반드시 이뤄진다’는 신념대로 남은 11개월을 보낼 생각”이라며 “관객 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배우, 스태프들에게도 지금처럼 ‘박영주는 믿고 맡길 수 있는 배우’라는 생각을 심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기회가 된다면 좋은 창작뮤지컬에 출연해 한국어로 노래하고 연기하고 싶다. 브로드웨이에서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청각장애인 배우들과 함께 만든 것처럼 청각장애인도 같이 즐길 수 있는 뮤지컬을 제작하고 싶은 바람도 있다. 박영주는 자신처럼 웨스트엔드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스스로 뮤지컬을 좋아하는지 물어보라”고 조언했다. “나는 스스로 ‘뮤지컬 덕후’라고 말하고 다닌다. 좋아하는 일이라면 힘들고 지쳐도 극복할 수 있다.”

배우 박영주의 뮤지컬 ‘미스 사이공’ 영국 투어 투이 역 데뷔를 축하하기 위해 동생 박병주가 그려준 커버 그림(사진=배우 박영주 제공).
뮤지컬 ‘미스 사이공’ 영국 투어 팀이 지난달 12일(현지시간) 영국 맨체스터 팰리스에서 열린 공연에 배우 박영주가 투이 역으로 데뷔 무대를 갖게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남긴 메시지(사진=배우 박영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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