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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나랏빚 증가가 무조건 위험하다는 것은 편견이다.”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페이스북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주제는 ‘국가채무(또는 부채)’다. 빚 증가가 심각한 문제라는 지적과 그 위험성을 과장하는 것은 ‘공포 마케팅’이라는 주장이 맞부닥쳤다.
불어나는 정부 빚은 나라 경제나 국민에게 정말 심각한 위협일까? 맞는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생길까?
채무는 꾼 돈, 부채는 줄 돈
이를 논하기 앞서 먼저 나랏빚 정의부터 따져봐야 한다. 기준에 따라 규모가 천차만별이어서다.
용어부터 짚자. ‘채무’(debt)와 ‘부채’(liabilities)는 다르다. 쉽게 말해 채무가 ‘빌린 돈’이라면, 부채는 ‘줄 돈’이다.
정부가 채권을 발행해 민간에서 조달한 자금이나 한국은행 등에서 꾼 돈은 채무다. 특정 시기에 돈을 갚겠다고 확정한 것이어서다. 부채는 꾼 돈 말고도 장래에 줘야 하는 돈까지 포함한다. 퇴직금이 대표적이다. 직원 퇴직금은 회사가 빌린 돈이 아니다. 그러나 줄 의무가 있다.
회계학은 채무를 ‘현금주의’, 부채를 ‘발생주의’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현금주의는 현금이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이를 장부에 적는 것이다. 가계부를 생각하면 쉽다. 발생주의는 다르다. 미래에 돈 줄 일이 생길 때마다 수익과 비용을 미리 계산해 지금 장부에 기록하는 방식이다.
정부가 민간 건설사 돈으로 도로를 깔고 나중에 운영비를 내거나 일정 수익을 보전하기로 했다고 치자. 이는 채무는 아니지만 부채다. 정부가 공무원과 군인에게 퇴직 후 지급해야 할 연금도 부채에 해당한다.
국가채무 627조, 공공부채는 1003조원
①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채무를 합한 ‘국가채무’
②중앙·지방정부 부채에 정부 재정 지원을 받는 건강보험공단·한국장학재단 등 비영리 공공기관 부채를 합한 ‘일반정부 부채’
③일반정부 부채에 한국전력공사·한국토지주택공사(LH) 같은 비금융 공기업 부채까지 더한 ‘공공부문 부채’다.
국책은행 등 금융 공기업 부채는 정부 빚 통계에 포함하지 않는다. 은행에 들어오는 예금은 회계상 부채로 인식하는 특수성을 고려해서다.
보통 나랏빚이라고 하면 ①을 가리킨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직접 꾼 돈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627조 1000억원이다.
②와 ③은 다른 나라와 비교하기 위해 집계한 것이다. 정부와 공공이 직접 갚거나 넓은 의미에서 언젠가는 줘야 할 돈이다. 2015년 기준 ②는 676조 2000억원, ③은 1003조 5000억원에 달한다.
국내총생산(GDP)에서 ①이 차지하는 비중은 38.3%다. ②와 ③은 각각 43.2%, 64.2%다. 나랏빚이 연간 국내 전체 소득의 3분의 1~2 정도 된다는 뜻이다.
한국의 정부 부채는 국제적으로 양호한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GDP 대비 일반정부 부채 비율은 2015년 기준 (가중) 평균 115.5%였다. 우리나라(43.2%)의 세 배에 육박한다.
韓 대외채무 ‘양호’…재정위기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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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빚이 경제에 미칠 실질적인 위험은 크게 둘이다.
첫째, 다른 나라에서 빌린 돈을 못 갚는 경우다.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가 겪은 재정위기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런 위험성은 매우 낮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예를 들어 지난해 우리나라 전체 국가채무(①·591조 9000억원)의 87.3%(516조 9000억원)는 정부가 국고채권을 발행해 끌어다 쓴 돈이다. 이주섭 기획재정부 국채과장은 “정부가 발행한 국고채에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통화안정채권을 합쳐도 외국인 보유 비중은 대략 11~12% 정도”라고 했다. 국고채 대부분은 원화로 원리금을 갚는 ‘원화 표시 채권’이다. 급할 땐 한은이 돈을 찍어서 줘도 된다.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에는 국고채 외에 달러 등 외화로 원리금을 상환해야 하는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도 있다. 그러나 규모가 전체 국가채무의 1.1%(6조 7000억원)에 불과하다.
뒤집어 말하면 정부가 찍은 채권의 85% 이상을 국내 자산운용사·연기금·보험사·은행 등 기관 투자자와 개인이 들고 있다는 얘기다. 일본처럼 국내 민간 부문이 나랏빚 대부분을 대주는 구조다. 디폴트(국가 부도 사태)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가장 넓은 의미의 정부 빚인 ‘공공부문 부채’(③·1003조 5000억원)로 범위를 확대해도 마찬가지다. 전체 부채의 94.7%(950조 6000억원)가 원화 부채다. 국내 채권자가 전체 부채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89.3%(896조 3000억원)에 달한다.
외환위기 가능성도 ‘기우’
1997년 한국을 휩쓴 외환위기는 나랏빚이 아닌 민간 은행이 보유한 외화가 바닥난 게 화근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태가 재발할 확률도 낮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우리나라 전체 대외채무 3809억 달러 중 만기 1년 이하 단기 외채 비율은 27.6%(1052억 달러)였다. 대외채무는 정부뿐 아니라 국내 민간 금융기관, 개인 등이 외국(국내 비거주자)에 갚아야 할 돈을 모두 포함한 것이다. 국내 외환보유액(3711억 달러)에서 단기 외채가 차지하는 비중은 28.3%다. 급히 외화가 필요할 때 꺼내쓸 수 있는 돈이 네 배 정도 된다는 의미다.
한 민간 경제 연구기관 관계자는 “그리스 재정위기가 발생한 것은 이 나라가 유럽연합(EU) 단일 통화인 유로화를 쓰면서 무역 불균형을 완화할 환율이 제 기능을 못 하는 가운데, 계속 쌓이는 무역적자를 정부가 외채를 조달해 보전하려 했기 때문”이라며 “우리나라는 경상수지가 60개월째 흑자를 내고 있고, 정부의 외채 의존도도 매우 낮으므로 비슷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없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나랏빚은 국민이 정부에 맡긴 ‘예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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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역시 손익 계산을 명확히 해야 할 문제다.
누군가 소비하려면 누군가는 저축을 해야 한다. 정부 부채는 곧 민간의 자산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나랏빚 대부분은 정부가 국내 기관이나 국민 여유 자금을 빌린 것이어서다. 민간은 정부로부터 원리금 받을 권리가 있는 채권자다. 민간이 여윳돈을 정부라는 은행에 저축한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정부 빚이 고스란히 미래 세대 부담도 아니다. 자녀 세대는 부모 세대가 가진 채권을 물려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미래 세대로부터 걷은 세금을 다시 미래 세대에게 부채 원리금으로 되갚는 구조다.
750조 연금충당부채, 경제 성장하면 규모 ‘뚝’
전문가들은 나랏빚 규모나 그 위험성을 과장해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경고한다. 정부의 재정 정책을 소극적으로 만들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 한 예가 정부가 공무원·군인 연금 가입자에게 나중에 지급할 연금 급여액(연금충당부채)을 비용으로 선(先)반영한 국가부채다.
이 금액은 작년 말 기준 1433조 1000억원으로 1년 전보다 무려 139조 9000억원 늘었다. 공무원과 군인에게 2016년부터 2095년까지 80년간 줘야 할 연금 추정액이 659조 9000억원에서 752조 6000억원으로 불어난 영향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게 전부 줄 돈은 아니다. 여기에는 연금 가입자가 매달 내는 보험료 수입이 빠져 있어서다. 순수하게 나가는 돈만 계산했다는 이야기다. 매년 발생하는 실제 부족액(연금 지출-수입)은 이보다 훨씬 적다.
추정 방식이 바뀌며 연금 부채가 부풀려진 영향도 있다.
정부가 미래에 지급할 연금을 지금 당장 비용으로 잡으려면 특정 계산법이 필요하다. 똑같은 100만원이라도 지금 내 손에 있는 돈이 나중에 받을 돈보다 가치가 높듯, 현재와 미래의 돈 가치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때 적용하는 것이 국채 수익률(이자율)을 기준으로 한 ‘할인율’이다.
만약 할인율이 높다면 미래에 연금 100만원을 주기 위해 지금 수중에 50만원만 있어도 된다. 가만히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이자가 두둑이 붙을 것이라서다. 반대로 할인율이 이보다 낮다면 50만원보다 많은 돈을 현재 비축해 놓아야 한다.
인사혁신처에 따르면 지난해 이 할인율이 1년 전보다 평균 0.36%포인트 하락했다. 저성장·저금리 기조에 따라 국채 수익률이 내려가서다. 할인율은 0.5%포인트만 떨어져도 현재의 부채가 67조원 증가하는 것으로 계산된다. 순전히 가정에 근거한 추정치다.
정다은 인사혁신처 연금복지과 사무관은 “연금충당부채는 지금 일시에 다 줘야 하는 돈이 아니라, 국가가 나중에 줄 돈을 현재 시점에서 한 번 추산해 보려고 참고로 작성하는 것”이라며 “만약 경제 성장 속도가 빨라지고 이에 따른 물가·금리 상승으로 할인율이 높아지면 충당부채도 크게 줄어들 수 있다”고 말했다.
가계는 1300조 빚더미…정부만 ‘나홀로 방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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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빚은 규모 자체보다 그 돈을 어디에 쓰느냐가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시의적절한 정부 투자 지출은 지금 당장 채무 증가로 이어지더라도 장기적으로 경제 성장률을 높이고 미래 세수 기반을 넓힐 수 있어서다. 기업이 신(新)사업을 위해 은행 빚을 내는 것을 나무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빚은 무조건 나쁘다’는 선입견이야말로 나쁘다는 것이다.
마크 블라이스 미국 브라운대 정치학과 교수는 그의 책 ‘긴축’에서 “긴축 정책이 이루어지면 소득 분포 하단에 위치한 이들이 최상단에 있는 이들보다 잃는 것이 많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정부가 나라 곳간을 걸어 잠그면 공공 서비스나 복지 정책 의존도가 높은 저소득층이 직격타를 맞는다는 뜻이다.
지난해 말 기준 한국의 가계부채 잔액은 1344조 3000억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정부가 공공 임대주택 건설에 예산을 좀 더 썼다면 빚 내 집 사는 부담을 가계만 짊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역대 최대 빚을 안은 가계가 역대 최고 국가 신용등급을 자랑하는 정부 빚을 걱정하는 아이러니가 성립하는 곳이 바로 한국 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