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 "학창시절 `문제아`였던 것 후회"

돌아온 서태지 단독 인터뷰
"우린 한국 최고… 세계 최고만 남았다"
나를 ''구속''하는 한국에선 창작활동 힘들어
  • 등록 2008-10-04 오후 1:30:00

    수정 2008-10-04 오후 1:30:00

[조선일보 제공] 서태지(36·본명 정현철)는 따로 만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뉴스가 되는 가수다. 1996년 '서태지와 아이들' 은퇴 선언 후 서태지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극도로 자제했다. 각 매체들이 집요하게 그를 만나려는 것은 대특종을 기대해서가 아니다. 만나는 것 자체가 경쟁이 돼버린 것이다.

그는 3집 음반 수록곡 '내 맘이야'에서 "난 신문을 보면/ 눈이 뒤로 돌아가" 라며 매스컴을 조롱했다. 그러곤 무대 위에서 스포츠신문을 찢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랬는데도 언론이 서태지에 목 매는 것을 보면 그의 '매스컴 길들이기'가 성공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서태지에게서 전갈이 왔다. "인터뷰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9월 29일 오후 8시 서울 강남의 서태지컴퍼니 사무실로 갔다. 서태지컴퍼니 직원이 버튼식 자물쇠로 작동되는 엘리베이터에 태우고 지하 3층으로 내려가 다시 IC 카드를 이용해 문을 열며 말했다. "여긴 맘대로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어요."

서태지는 최근 3장으로 된 8번째 음반 중 첫 싱글 앨범을 내놓았다. 2004년 7집 후 4년6개월 만이다. 1992년 '난 알아요'라는 노래로 한국인 뇌에 규모 7.0 강진(强震)을 일으킨 서태지는 '하여가' '교실이데아' 등을 줄줄이 히트시키고 96년 1월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솔로로 컴백해 수 년 만에 한번씩 새 음반을 들고 나타나 활동하다가 사라지길 반복해왔다.

7월 말 새 음반을 발표한 서태지는 8월 15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자신의 록 페스티벌인 'ETP 페스티벌'을 열었다. 9월 27일엔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영국 로열필하모닉과 함께 '서태지 심포니'를 구성해 록―클래식 협연을 했다. 그때마다 2만~3만 명이 공연장을 메웠다.

"이 건물 몇 층에 서태지씨가 있나요?" 이 질문에 직원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이 건물 안에는 계십니다." 우스꽝스러운 문답은 더 진척되지 않았다. 아마도 서태지는 건물 내부에서 숙식과 음악작업을 모두 해결하고 있는 듯 했다.

서태지컴퍼니 직원들은 서태지를 '서 회장'이라 부른다.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다. 직원들끼리 "서태지씨가…" 식으로 말하면 남들이 알아들을까봐 다른 호칭을 궁리하다가 '회장'이란 호칭이 굳어졌다고 한다.

'서 회장'은 약속시각을 조금 넘겨 나타났다. 이틀 전 공연 피로 탓인지 얼굴이 꺼칠해 보였다. 입 주변에 수염이 짧게 자라 있었다. 양쪽 무릎이 뚫린 청바지에 운동화, 회색 셔츠에 모자 차림의 그는 "정말 오랜만이네요" 하고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그와는 2004년 인터뷰 때 한번 만난 적이 있다.

―회사가 언제 이쪽으로 이사했나요?

"2년쯤 된 것 같아요. 이번에도 외국에서 음반 녹음을 할 수 있었는데, 이사도 다 했고 스튜디오, 연습실 다 돼있다고 해서 2년 전쯤 몰래 한국에 들어왔어요. 2004년에 활동 끝내고 인도와 미국 여행을 했는데 이번 작업은 한국에서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죠. 내내 여기서 작업했어요."

―외국에서 작업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자유롭기 때문에'라고 했었죠?

"창작을 할 때는 자유가 필요해요.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자유요. 대중교통을 타고 가다가, 길거리에서 진열장을 보다가도 뭔가 영감을 얻을 수가 있죠."

―그럼 서태지를 구속하는 것은 뭔가요?

"저를 구속하는 것은 한국이죠. 한국에서는 맘대로 돌아다닐 수가 없으니까 쉬어도 인풋(input)이 없어요. 인풋이 없으니 음악 창작도 안 되죠."

―맘대로 돌아다니지 못하는 건 팬들 때문일 텐데 그럼 결과적으로 팬들이 서태지씨를 구속한다는 뜻이 됩니다만.

"팬들이 저를 구속하지는 않죠. 그렇게 느끼는 제가 '변태'죠. 어떤 사람들은 팬들이 알아보고 달려들어도 그걸 즐기는 사람도 있어요. 저는 그걸 못해요. 제가 록 밴드 시나위에 몸 담았을 때부터 사람들이 절 보고 깜짝 놀라는 게 무척 미안했어요. 그때 머리를 많이 길러서 화장실에 가면 여자인 줄 알고 깜짝 놀라고…. '난 알아요'가 이걸 증폭시켰어요. 1992년 명동에 그냥 옷 구경하러 갔는데 사람들이 우리를 포위해 교통이 마비되고 경찰이 사람들을 끌어내고…. 차 한 잔을 마셔도 손가락질하고 웅성웅성 하는 그걸 저는 못 견뎌요. 그러다보니 혼자 지내는 게 습관이 돼버렸어요."

―밥 먹으러도 나가지 않나요?

"밥은 여기서 시켜 먹기도 하고 일하는 아주머니가 해주시고… 가끔 어머니가 와서 해주기도 하고요."

―그럼 2년 전에 와서 이 건물 밖에 나간 적이 없단 말인가요?

"스키장에 한번 갔어요. 그리고 아무도 없는 시골로 한번 놀러 가고요. 그게 전부예요."

그는 "습관이 돼서 답답하지 않고, 어려서부터 방에 틀어박혀 조립식 장난감을 만들고 음악을 만드는 일에 익숙해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한국의 일상에서 영감을 얻지 못하는 건 일종의 불행"이라고 하자, 그는 엄지와 검지로 "딱" 소리를 내며 "그렇죠!"라고 말했다.

9월 27일 서태지와 로열필하모닉의 협연은 서태지의 오랜 꿈이 이뤄진 것이다. 서태지는 3집에 실린 노래 '영원'에서 이미 클래식 음악을 시도했었다. 알려진 대로 서태지의 셋째 할아버지 정희석(2002년 작고)씨는 연세대 음대학장을 지낸 국내 음악계 원로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은 오랜 꿈이었죠?

"'영원'을 만들 때만 해도 디즈니 영화음악처럼 장엄한 클래식 음악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제가 클래식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쉽지 않았습니다. 메탈리카가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음반 'S&M'을 듣고 나서 언젠가 꼭 나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지요."

이번 공연은 영국인 지휘자 톨가 카쉬프(46)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서태지가 2년 전 이번 공연의 기획 단계에서 "카쉬프가 섭외되면 공연을 하고 섭외 못하면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공연기획사와 계약을 했기 때문이다. 카쉬프는 클래식계에서는 무명이지만 2002년 영국 밴드 퀸의 음악을 오케스트라로 편곡해 연주한 크로스오버 음악인이다.

"카쉬프가 클래식계에서 유명한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클래식 쪽에서는 이단아(異端兒) 같은 존재예요.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니까 저하고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점이 비슷하던가요?

"메이저 음악 이력에서 뛰쳐나와서 새로운 걸 시도하고 성공하기도 하고 욕도 먹고… 일종의 동질감을 느꼈어요. 저도 옛날 록음악 할 때부터 형들한테 욕 많이 먹었거든요. 록음악 안 듣고 '삼표 음악' 듣는다고요." 그가 말하는 '삼표 음악'은 흑인음악의 당시 은어다. '삼표 연탄'이 유명했던 시절이다.

―음악 하기 전 중학교 때부터 '문제아'였죠?

"쉽게 말해 '양아치'였죠. 집 나가서 돈 번다고 일도 하고 남자들끼리 싸워서 서열도 정하고…. 그래도 그때 배운 게 지금 많은 도움을 주는 것 같아요. '깡' 같은 게 생긴 거죠. 어떤 일이 생겨도 나는 할 수 있다 같은 생각 말이죠."

―이번 공연에서 '교실 이데아'를 부르기 전에 "교육이 한마디로 엉망진창이다"라고 했는데, 교육에 대해 특히 관심이 많습니까?

"엉망진창이니까 엉망진창이라고 한 거죠. 실제로 '교실 이데아'가 나왔던 94년에 비해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어요. (학생들이) 어린 시절에 너무 많은 걸 파괴 당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여전히 주입식 교육이고. 제 팬들 중엔 벌써 학부모가 된 사람도 있고 아직 학생도 있어요. 스스로 바꾸지 않으면 아무도 바꿔주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저 스스로가 제도교육이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학교를 그만뒀으니까요."

―가출을 많이 했다고 무대에서 말했는데, 첫 가출은 언제였나요?

"가출횟수는 셀 수 없을 정도예요. 1, 2주 사라진 적도 있고 며칠 있다가 나타나기도 하고. 중2, 중3 때쯤 처음 가출한 것 같아요. 음악을 하기 시작했고 학교에서는 체벌에 저항하기 시작했죠. 사랑의 매든 아니든 폭력은 안 된다고 그때 확신했어요. 중 3때 한 명이 잘못했다고 반 전체가 단체로 매를 맞은 적이 있어요. 그때 교실을 나가버렸어요. 그 이후 우리 반에서 체벌이 사라졌어요. 그래서 친구들이 저한테 고마워하기도 했죠(웃음)."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 역시 중 3때 담임선생님 아닌가요?

"바로 그 선생님이 단체 기합을 줄 때 제가 학교를 뛰쳐나간 거예요. 그 일 이후 선생님은 저를 위해 체벌을 없애고 졸업할 때까지 저를 이끌어주셨어요. 그때 머리나 옷도 단정치 못했는데, 졸업사진은 오래 남는 거라고 선생님이 타일러서 얌전하게 사진을 찍었죠. 그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중 3때 이미 학교를 그만뒀을 거예요."

―지금은 그때 '문제아'였던 것을 후회하나요?

"후회하지요. 같은 시기에 부모님에게도 많이 맞았어요. 저는 사춘기에 접어들어 있었고. 음악 하면서 겉멋이 들어 집이든 학교든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까지 생각했으니까요. 정말 어린 생각이죠. 학교는 몰라도 집은 버리면 안 되는 건데. 학교든 집이든 매만 들었다 하면 무조건 나가버렸어요."

서태지는 중 3 담임교사 덕분에 마음을 다잡고 '컴 백 홈' 했다. 이후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서울 북공고 건축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1학년 도중 중퇴하고 말았다.

―다시 '가출 벽'이 도진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좀 컸어요. 그런데 점점 제 인생에서 음악의 비중이 커지니까 그쪽에 집중하고 싶어진 거죠. 중학교 때만 해도 부모님이든 선생님이든 설득하려 하지 않았는데, 아버지를 설득해 학교를 그만두기로 하고 나서는 집에서 열심히 기타를 치고 연습하는 모습을 보여 드렸어요. 그리고 '시나위'에 들어가서 돈도 벌고 차도 샀지요."

―'문제아'로 분류되는 10대들에 대한 관심이 많은 편입니까?

"그렇다고 해야죠. '컴 백 홈'을 만들 때, 중 3때 느꼈던 것을 모두 그 노래에 담았어요. 심장은 터질 것 같고, 생명이 태어나자 마자 부모의 제압이 시작됐다…. 물론 결국 집으로 돌아가라는 내용이긴 하지만, 그 노래에 그런 생각을 담았어요. 그들을 이해하는 게 중요해요.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한다 해서 들을 나이도 아니죠. 그때는 세상의 중심이 다 자기 자신일 테니까."

노래 '컴 백 홈' 가사는 '다시 하나의 생명이 태어났고/ 또다시 부모의 제압은 시작됐지/…/ 터질 것 같은 내 심장은/ 날 미치게 만들 것 같았지만'하고 클라이맥스로 치닫다가 '난 이제 깨달았어/ 날 사랑했다는 것을/ 유 머스트 컴 백 홈' 하고 마무리된다.

이제 서태지 팬들은 가출보다 독립을 생각할 나이다. 대다수가 20대이고, 30대 팬도 꽤 많다. 지난 8월 ETP 페스티벌에는 유모차를 끌고 온 부부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서태지 데뷔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던 중고생들도 공연장에서 볼 수 있다. 서태지는 "중고생들을 보면 정말 귀엽다"며 "내가 '난 알아요'를 부를 때 수정(受精)되지도 않은 무(無) 존재였으니까"라며 웃었다.

서태지 팬은 '서태지 마니아'와 보통 팬으로 나뉜다. '마니아'들의 열광도는 빅뱅이나 동방신기 팬 못지않다. '서태지 심포니' 공연이 모두 끝난 뒤 20대 여자 팬 4명이 무대 정면을 바라보더니 외쳤다. "오빠! 오늘 이렇게 좋은 공연 보게 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그 4명은 이어 바닥에 엎드려 넙죽 큰 절을 올렸다. 서태지에게 그 목격담을 들려줬다.

"하하, 그건 팬들이 하는 일종의 퍼포먼스로 봐야죠.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즐길 줄 아는 거예요. 정말 재미있는 공연문화인 것 같아요."

서태지의 공연을 보면 그가 마니아들을 한없이 사랑하는 걸 느낄 수 있다. 서태지는 공연 중간 중간 연인이나 동생에게 하듯 반말을 섞어서 이들과 대화한다. '서태지 심포니' 공연에서도 그는 "떠들면 안돼. 이건 심포니니까", "이 귀여운 희귀생명체 같으니라고"같은 말을 했다. 그때마다 객석에서는 여성 팬들의 환호가 터졌다.

―그런 말투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서태지가 마니아들만 상대한다는 거죠.

"제 공연 관객은 대다수가 저보다 나이가 적고 해서 동아리 같은 느낌이 들어요. 마니아들만 상대하는 것 같다는 말, 일리가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저에게 집중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런 말투는 '완전 팬'들에게만 들리는 말이겠죠."

―'완전 팬'은 뭔가요.

"서태지닷컴 회원으로 주기적으로 닷컴 안에서 활동하면서 그 안에서 이뤄지는 대화를 모두 알아듣는 사람들을 '완전 팬'이라고 할 수 있죠. 공연 중 제 대화의 절반은 그런 팬들을 향한 것이고, 나머지는 다른 팬들까지 포함하는 겁니다. 물론 팬을 그룹으로 나눌 수는 없겠지만요."

―'보통 팬'들 사이에선 네 곡 담긴 이번 음반이 1만1000원 안팎은 너무 비싸다는 의견이 꽤 있었습니다.

"다른 음반보다는 좀 비싸게 팔자고 한 건 사실이에요. 제 음악에 대한 가치를 그렇게 부여하고 싶었어요. 음반에 쏟아 부은 정성, 비용, 기간이 그 정도 가치는 있다고 생각해요. 음반 값이 얼마냐는 논쟁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중요한 건 내용물이죠. 5집 때는 러닝타임이 짧은데 비싸다고 했었죠. 노래 길이가 짧다고 음반 값이 싸야 한다면, 그림은 극장 간판이 가장 비싸야 한다는 논리와 같습니다. 그만큼 자신감이 있으니까 좀 비싸게 받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죠."

―공연 역시 무대장치를 비롯해 제작비를 너무 많이 들이는 것 아닌가요. 그러다 보니 티켓 값이 올라가는 것일 테고요(서태지 심포니 티켓은 최고 16만5000원이었다).

"무모할 정도로 제작비를 많이 들이죠. 욕심이 과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일단 하고 싶은 것은 해야 하니까요. 팬들에게 좋은 무대를 선사하고 싶은 게 가장 기본적인 생각이에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치로 하고 싶어요. 후회 없이 모두가 행복할 만한 무대 말이에요."

서태지의 욕심은 무대연출에서 그치지 않는다. 음과 박자를 부수고 쪼개어 낱낱이 해체한 뒤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재조립하는 그의 작곡과 편곡은 한국에서 그가 오롯이 개척해왔다. 2년 전에 한국에 들어왔으나 신곡 4곡을 최근에서야 발표한 것은 그런 작업에 들이는 시간 때문이다.

이렇게 완성된 곡은 연주라는 마지막 단계를 통과해야 한다. 문제는 서태지가 쓴 곡을 연주할 만한 뮤지션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 새 음반에서는 리듬 부분을 극도로 잘게 나눴기 때문에 드러머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서태지는 그가 국내 최고 드러머로 꼽는 '피아'의 양혜승과 함께 녹음을 했지만, 라이브 공연 드러머는 오디션을 통해 최현진을 뽑았다.

―연주를 금방 하던가요.

"오디션을 본 뒤 '한 달간 하루 종일 연습만 해야 한다. 할 수 있겠냐'고 했더니 현진씨가 '할 수 있다. 하루 종일 드럼만 치는 게 내 꿈이다'라고 했어요. 그래서 두 손이 다 부르트게 연습을 했어요. 한 달 뒤 '이제 됐다' 하면서 얼싸안고 외쳤죠. '우리가 일단 한국 최고는 된 것 같다. 이제 세계 최고가 되자.'"

서태지는 이어 인디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다들 서태지가 인디 뮤지션 빼가서 인디가 망한다는데, 가슴 아픈 얘기예요. 서태지 밴드에 합류한다고 한국 인디가 망한다면 이상한 거죠. 저는 정말 실력 있고, 할 수 있는 사람들과 음악을 하고 싶을 뿐이에요."

2000년부터 서태지와 함께 활동해 온 안성훈(기타)은 이렇게 말했다. "서태지씨와 함께 작업하면서 많은 걸 배웠고 경험했습니다. 제가 인디에 계속 있었다면 이런 경험을 하지 못했겠지요. 공연 앞두고 한 달 간 매일 12시간씩 연습하는 '감금생활'이 힘들긴 하지만, 서태지 밴드에 있으면 욕심이 생겨서 힘든 걸 잊어버리게 됩니다."

서태지의 새 노래 가사들에서는 세상에 대한 증오나 경멸이 보이지 않는다. 과거 '시대유감'이란 노래에서 "짜식들 거 되게 시끄럽게 구네/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하는 가사가 심의에 걸리자 노래를 통째로 들어내고 연주곡으로 출시했던 그가 유순해진 걸까.

―그런 것을 '서태지 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정신은 아직 유효한가요.

"정신이오? '똘끼'라고 해야죠. 지금도 그런 상황이 오면 생각은 똑같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 그는 "마음은 아직 10대거든요"라고 했다. "마음은 20대"가 아니고? "저는 15세에 머물고 싶어요. 중 3때요. 그때 방황했던 것을 소중하게 생각해요. 그게 제 음악과 인생에 좋은 거름이 됐어요." 피곤해 보이던 서태지 얼굴에 어느새 윤기가 돌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자 자정이 훌쩍 넘었다. "앞으로 4년 뒤에나 또 만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좀 길죠?" 라고 대답한 뒤 덧붙였다. "아마도 내년 여름 전까지만 활동하고 또 다음 앨범 준비를 시작하게 될 겁니다. 일단은 한 달 정도 푹 쉬고 놀고요. 새 음반을 내는 데 너무 오래 걸리는 게 팬들에게 미안하지만, 시간에 얽매이다 보면 음악이 재미 없어지거든요. 거기서 벗어나면 편안하고 행복하게 음악을 만들 수 있어요. 'FM 비즈니스'에서 벗어나보자는 것이죠." 'FM 비즈니스'란 'Fucked up Music Business(엉망진창 음악산업)'를 뜻하며, 7집에 실린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가 희고 가느다란 손을 내밀었다. 지하 스튜디오에 자승자박(自繩自縛)된 천재의 손바닥에서 에너지가 느껴졌다.
▲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위해 스스로를 옭아매고 몇 년씩 창작에 매달리는 서태지. 자기 관리에도 철저한 그는 인터뷰에서 녹음과 촬영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 사진 역시 인터뷰 후 소속사에서 찍은 것 중에 그가 골라 보내온 것이다. / 서태지컴퍼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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