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1960년대 미국, 자메이카 출신의 도널드 해리스와 인도에서 온 샤말라 고팔란은 버클리대 대학원에서 처음 만났다. 흑인의 차별 철폐와 투표권 획득을 위한 민권운동을 통해 서로를 알게 된 두 사람은 곧바로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첫 아기를 낳았다. 그 아기가 미국의 첫 아시아계 흑인·여성 부통령이 된 카멀라 해리스다.
| 야만적 가족 분리 정책에 반대하며 2018년 6월 22일 캘리포니아 남부 오태이 메사 교도소를 찾은 카멀라 해리스(사진=늘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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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스는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카멀라 해리스 자서전-우리가 가진 진실’(늘봄)에서 부모가 자신을 유모차에 태우고 민권운동에 참여했던 어린 시절을 이같이 회고한다. “지금도 무리 지어 움직이는 다리들, 에너지 넘치는 구호와 노랫소리가 물결처럼 가득했던 어린 시절 그 현장의 기억이 떠오른다. (중략) 어머니가 (유모차에서 칭얼거리던) 나에게 ‘뭐를 원하니?’라고 물었는데, 내가 큰소리로 ‘자유!’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민자 출신 검사에서 미국의 첫 아시아계 흑인·여성 부통령이 된 해리스의 정치철학의 바탕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미국에선 2019년 먼저 출간된 이 책에서 해리스는 유년 시절은 물론 로스쿨 졸업 이후 연방검사를 거쳐 샌프란시스코 지방검찰청 검사장, 캘리포니아주 법무부 장관, 그리고 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에 당선되기까지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고 있다.
책이 출간됐던 2019년은 백인 우월주의를 내세웠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집권기였다. 해리스는 당시의 미국이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있었다고 진단한다. 그는 서문을 통해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동성애 혐오, 트렌스젠더 혐오, 그리고 반유대주의가 이 나라에 실재한다”며 “우리는 미국 원주민을 제외한 (부유한 미래를 꿈꾸며 자발적으로 왔든, 노예선에 강제로 실려 왔든, 끔찍한 과거를 피해서 왔든) 모두가 이민자의 자손이라는 그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 1982년 11월, 하워드대학교 신입생 시절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와 남아공 투자철회를 위한 시위에 나선 카멀라 해리스(오른쪽)와 친구 그웬 휘트필드(사진=늘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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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를 대변하는 해리스의 정치 철학은 그의 삶 자체가 반영된 결과다. 이민자 부모 밑에서 자라난 해리스가 어린 시절 버클리의 흑인 문화센터 레인보우 사인에서 당대의 걸출한 흑인 사상가와 문화 비평가들의 강의를 들었던 에피소드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나처럼 레인보우 사인에서 시간을 보내는 어린이들은 그곳을 찾은 수많은 비범한 남녀들을 통해 자신의 미래상을 그려볼 수도 있었다”고 말한다.
이같은 해리스의 정치 철학은 검사로 일하게 되면서 그가 겪은 여러 이야기에서 빛을 발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여파로 위기에 처한 중산층 서민을 대변하기 위해 나섰던 사연, 불합리한 의료보험과 제약회사들과 맞서 싸운 일화, 기후 위기와 안보 문제, 인조마약 문제 해결에 앞장서고 사회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온힘을 쏟은 이야기가 책장 가득 펼쳐진다. 남편 임호프와의 첫 만남과 결혼하기까지의 이야기에서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도 잘 드러난다.
‘삶이 내게 가르쳐준 지혜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마지막 장에서는 해리스가 부통령으로서 앞으로의 미국을 어떻게 이끌어갈지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우리의 모든 차이점, 모든 투쟁, 모든 싸움에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의 미국인이고,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또한 어린 시절 부모가 자신을 데리고 민권운동에 나간 것처럼, 지금 각자의 위치에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투쟁하는 이들을 응원한다고 전한다. 트럼프가 내세웠던 차별과 혐오에 맞서, 이민자의 나라로서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로 나아가는 미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