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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이정훈 기자]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에서의 디플레이션은 앞으로 몇 개월 간 더 이어질 것 같습니다.”
지난주 유럽의회 금융위원회에 출석한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이처럼 우려섞인 발언을 내놨습니다. “앞서 6월에 조금 더 높았던 디플레이션 리스크가 9월에는 후퇴할 것”이라고 했던 자신의 발언을 2주 만에 뒤집은 겁니다.
디플레이션에 대한 라가르드 총재의 인식이 이렇게 바뀐 건 얼마 전에 유로스타트가 공개한 9월 소비자물가지수 통계 때문인데요. 이에 따르면 지난 9월 유로존의 소비자물가는 전년동월대비 0.3% 하락했습니다. 이는 앞선 8월의 -0.2%보다 더 확대된 겁니다. 이는 에너지 가격이 8.2%나 하락한 영향이 컸습니다.
그러나 우려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변동성이 큰 에너지와 음식료부문을 제외한 근원 소비자물가도 9월에 전년동월대비 0.2% 하락한 것인데요. 이는 8월의 -0.4%에 비해 하락폭이 다소 줄긴 했지만, 유로존 근원 물가가 두 달 연속으로 마이너스(-)를 보인 건 지난 2016년 이후 4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라가르드 총재는 유럽의회에서 “유로존 내에서의 경제활동이 빠르게 악화하고 있는 가운데 전력요금 인하와 유로화 강세, 독일에서의 한시적인 부가가치세(VAT) 인하 등이 물가 하락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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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대로 최근 8~9월 이례적인 유로존 물가 하락에는 일시적인 요인이 크게 영향을 준 것이 사실입니다. 자동차 등 내구재 판매 위축으로 인해 독일 정부는 한시적으로 부가가치세를 낮췄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명품 판매가 많은 국가들은 여름휴가철을 맞아 대대적인 할인행사를 단행했습니다. 이런 요인이 사라지는 10월부터는 물가가 다소 높아질 여지가 있어 보이긴 합니다.
그러나 현재 ECB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광범위한 디플레이션 압력이 서비스업 전반에서의 물가 하락을 가져오고 있는 대목입니다. 실제 9월 유로존 서비스업 물가는 전년동월대비 0.5%나 하락했습니다. 코로나19가 급작스럽게 창궐했던 지난 2월에 기록한 -1.6% 이후 최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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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유로존에서의 디플레이션이 우려스러운 건 부채 디플레이션(debt deflation)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1930년대 미국 경제학자인 어빙 피셔가 미국 대공황을 설명하면서 구축한 이 이론에 따르면 부채가 많은 국가들이 디플레이션으로부터 더 큰 위험에 놓이게 된다는 겁니다.
디플레이션으로 물가가 하락하고 실질금리가 상승하면 채무 상환에 부담을 느낀 가계나 기업이 보유자산을 서둘러 매각하면서 자산가치가 떨어지고, 향후 비용이 더 낮아질 것을 염두에 둔 기업도 대출과 투자를 줄이게 되기 때문에 경제 침체도 장기화한다는 것이죠. 정부 측면에서도 세수가 줄어들고 부채를 일으킬 여건이 악화되면서 재정지출을 늘리기 어려워집니다.
지난 유로존 재정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스페인과 이탈리아로 대표되는 남유럽 국가들이 문제입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전체 국내총생산(GDP)에서 관광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은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국가부채가 높고 금융시스템도 취약합니다. 디플레이션과 부채 디플레이션에 가장 취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코로나19 재유행이 없다고 해도 올해 GDP가 -12.5%에 이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 두 나라의 GDP대비 국가부채는 각각 120%, 150%에 이를 것으로 점쳐지고 있습니다.
이렇다 보니 이제 ECB에게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물가 안정과 최대 고용이라는 두 가지 정책목표(dual mandate)를 가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와 달리 ECB는 `중기적 물가 안정`이라는 하나의 통화정책 목표를 가지고 있다 보니 이같은 디플레이션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게 되는 것이죠.
ECB의 정책목표인 중기적 물가 안정에서 `중기적`이라는 표현에는 구체적인 기간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물가 안정`에 대해서도 구체적 수치가 제공되진 않습니다만, ECB는 이에 대해 “2%에 근접하지만 그보다는 높지 않은 수준” 정도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현재 ECB 실무진은 올해 근원 인플레이션이 1.0%, 내년에 1.1%, 2022년에 1.3% 정도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근에 있었던 ECB 고위 관계자들의 발언을 통해 향후 ECB가 취할 정책을 미리 전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인플레이션 목표가 바뀔 가능성이 있습니다. `2%에 근접하되 그보다 높지 않은 수준`이라는 게 덜 구체적이라는 것이죠. 라가르드 총재는 며칠 전 ECB 워처스 컨퍼런스에서 추가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유로존은 대중들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더 잘 반영하는 방식으로 산출되는 인플레이션 목표를 가질 필요가 있다”며 물가 목표 변경 가능성을 언급했습니다.
특히 라가르드 총재는 이 과정에서 연준이 최근 채택한 평균물가목표제(AIT)를 차용할 수 있다는 점도 시사했습니다. 그는 “신뢰할 수만 있자면 연준의 전략(=AIT)은 하한선에 근접한 경제를 안정시킬 수 있도록 하는 통화정책 능력을 강화시켜줄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또 “`중기적 물가 안정`에서 `중기적`이라는 정의를 유연하게 함으로써 일시적 경제 충격 하에서 통화정책을 긴축적으로 펴서 불필요하게 일자리와 경제 성장을 억누르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중기적`이라는 기간을 길게 봐서 일시적인 인플레이션 상승을 감내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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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ECB의 대차대조표를 더 확대하는 추가 자산매입 조치를 내놓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ECB는 이미 1조3500억유로 규모로 내년 6월까지 실행하기로 한 팬더믹긴급자산매입프로그램(PEPP)를 더 연장하고 더 확대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 시기는 12월 정도로 점쳐집니다. 최근 물가 하락과 코로나19 재유행을 감안해 ECB 실무진이 경제 성장률과 인플레이션 전망치를 하향 조정할 시기가 그 즈음이기 떄문입니다. ECB 통화정책회의는 연내에 10월29일과 12월10일 두 차례 더 남아 있습니다.
루이 데 귄도스 ECB 부총재는 이번주 한 강연에서 “우리는 아직도 실탄이 소진되지 않았다”며 “만약 필요하다면 PEPP를 추가로 조정(=연장 또는 확대)할 수 있는데, 아직까지는 당장 조치를 취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습니다. ECB는 PEPP를 처음 도입하면서 매주 200억유로 이상씩 자산을 매입하다 6월부터 그 규모를 줄였습니다. 그러나 최근 코로나19 재유행과 경제지표 부진이 이어지자 지난주 160억유로로 매입규모를 늘렸고, 아직 7900억유로가 남아있어 내년 6월말까지 매주 200억유로씩 자산을 더 살 수 있습니다.
끝으로 기준금리는 추가로 인하하지 않는 대신에 목표물 장기대출프로그램(TLTRO III)을 확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라가르드 총재는 “우리 정책수단들은 상호 보완적입니다. 마이너스 금리와 TLTRO를 보면 TLTRO 금리를 낮춤으로써 실제 마이너스 금리로 은행들에게 신용(대출)을 공급하는 효과를 누릴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은행 수익성을 악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시중에 대출을 늘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를 종합하면 ECB가 앞으로 꺼낼 수 있는 카드는 인플레이션 목표 변경과 연준 방식을 차용한 평균물가목표제 도입, PEPP 추가 확대, TLTRO III 규모 확대 등인데요. 지금으로써는 어느 수단을 먼저 꺼낼 지 짐작하긴 어렵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과거에도 ECB의 주요한 정책 변화를 발표했던 ECB 연례 경제정책컨퍼런스에서 라가르드 총재가 결정적 힌트를 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매년 포르투갈 신트라에서 개최되는 ECB 연례 경제정책컨퍼런스는 올해는 11월 11~12일 양일 간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