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황병서 기자]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가족 위치추적기 앱으로 부모님 생사부터 확인해요.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 한국에서 2년째 체류 중인 그리신 볼로디미르(21·남)씨가 서울 성북구의 한 카페에서 이데일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사진=황병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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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서울 성동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리신 볼로디미르(21·남)씨는 우크라이나에 있는 가족의 안부를 묻자 이같이 말했다. 고려인이자 우크라이나 동남부지역의 격전지인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주 니코폴시 출신인 그는 2년 전 고려대 경영학과 21학번 신입생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볼로디미르씨는 러시아가 고국을 침공한 지난해 2월 말 이후 1년 넘게 우크라이나에 있는 가족과 연락하며 마음 졸이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있는 부모가 살던 집은 지난해 8월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지붕이 부서지고 철제 울타리가 휘어지는 등 피해를 입었다. 미사일이 또다시 날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동생을 친척이 있는 독일로 피신시켰다.
그는 “부모님은 조국을 돕기 위해 고향에 남기로 했다”며 “현재는 생수, 스파게티면, 기저귀 등 생필품을 구해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다”고 전했다. 볼로디미르씨의 부모는 낮에는 니코폴에서 구조 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밤이면 인근 친척 집으로 피신한다. 니코폴 인근 5㎞ 근처에 러시아 군대가 있는 데다, 유럽 최대 원자력발전소 중 하나인 자포리아 원전이 근처에 있어 만일의 위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볼로디미르씨의 가족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인들의 일상 자체가 전쟁 중이다. 그의 많은 친구들은 직장을 잃고 인근의 안전한 도시로 거주지를 옮겼다. 지인의 친형은 수개월째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도네츠크주 바흐무트에서 군 생활을 하다 다쳐 병원으로 이송됐다. 드니프로시로 거처를 옮겼던 이웃 주민들은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에 아파트가 무너져 사망했다. 그는 “고국에 사는 모든 사람은 내가 만나는 사람과의 현재 만남이 마지막이 될지 항상 걱정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 그리신 볼로디미르의 부모가 니코폴 지역에서 러시아 공격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나눠줄 생필품을 차 안에 보관하고 있다.(왼쪽) 지난해 8월 그리신 볼로디미르의 부모가 거주하는 니코폴 지역의 집이 러시아 미사일 공격으로 피해를 입었다.(사진=그리신 볼로디미르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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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탓에 2년째 한국에 체류 중인 그의 삶도 180도 바뀌었다. 수준 높은 한국의 교육을 경험하러 왔지만, 현재는 학업보단 고국의 실상을 알리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이 전쟁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떠나가고 잊혀지는 것이 가장 두렵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이 발발했던 지난해 2월 고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지만, 부모가 현재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을 하라고 만류해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나섰다. 대표적으로 서울 중구 주한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일요일마다 진행하는 반전 집회에 참여하고, 우크라이나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매일 SNS(사회연결망서비스)에 알리고 있다. 작년 4월부터 매일 착용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영토를 형상화한 브로치를 주변 지인들에게 나눠주며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볼로디미르씨는 “전쟁이 1년 넘게 지속되면서 ‘나와는 상관없다는 식’의 무관심이 가장 두렵다”며 “인류애 관점에서 우크라이나를 잊지 말고 기억해 달라”고 호소했다.
한국의 인도적인 지지와 지원도 거듭 촉구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UN연합군의 도움을 받아 전쟁을 종료할 수 있었듯이 우크라이나도 국제적인 지지와 지원을 많이 받을수록 전쟁은 더 빨리 끝날 것”이라며 “아직도 우크라이나에서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 만큼, 많은 관심과 연대를 부탁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