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량을 똑같이 늘리더라도 산업구조, 유통구조 발달에 따라 생산성과 돈이 도는 속도가 변하면 물가에 미치는 영향도 달라진다. 예를 들면, 울릉도에서 잡은 오징어가 소비자 밥상에 오르려면 공판장, 중간상인, 소매상까지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최종 소비자 가격은 애초 경매가의 몇 배로 불어나게 된다. 오늘날에는 생산자와 소비자 직거래가 흔해져 화폐유통속도가 느려지며 중간마진이 줄어들어 물가안정에 기여했다. 게다가 지속적 기술혁신으로 생산성이 빠르게 향상돼 생산비가 줄어들었다. 확대재생산이 어려웠던 농업분야까지도 농업혁명 지속으로 생산성이 크게 진척됐다.
통화량 증가에 따른 물가상승요인을 화폐유통속도 저하에 따른 물가하락요인이 상쇄시키면서, 돈을 웬만큼 풀어도 물가가 오르지 않는 즐거운 현상이 벌어졌다. “화폐유통속도가 일정하다”는 전제조건이 크게 변해가자 금융정책 관계자들이 오판하기 쉬워졌다. 2000년대 초반 유동성을 확대해도 물가가 안정되자 (경제대통령으로 불렸던) 미 연준 의장 그린스펀은 경기상승세를 유지하기 위해 초저금리 정책을 펼쳤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갑자기 고금리로 선회해 2008년 국제금융위기의 원인이 됐다. 오늘날 전 세계 인플레이션 원인은 공급망 교란도 있지만 돈을 풀어도 물가에 큰 영향이 없을 거라고 착각한 중앙은행의 책임이 크다.
집값은 오르는데 물가는 오르지 않는 현상은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났다. 방만한 재정운용으로 크게 늘어난 유동성이 생산부문으로 흐르지 않고 자산시장으로 유입된 까닭이다. 돈을 계속 풀면서 “부동산만은 자신 있다”는 호언장담을 거꾸로 해석한 세대가 부채를 짊어지고 집을 마련했다가 금리가 폭등하자 이자부담을 견디지 못해 투매하는 아픔을 겪고 있다. 경기부진에 따른 수요부족으로 물가는 머지않아 잡히겠지만, 금리가 정상화될 경우 많이 풀린 돈이 어디로 방향을 바꿀지 모른다. 아무리 급해도 재정안정의 바탕위에 대책을 추진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