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 View]'유동성의 역습'…뿌린대로 거둔다

'불확실성 극복을 위한 금융투자' 저자
  • 등록 2022-11-22 오전 6:15:00

    수정 2022-11-22 오전 10:38:00

[신세철 경제칼럼니스트] 돈이 도는 속도가 일정하다고 가정하고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이라는 프리드먼의 선언은 상당히 변색됐다. 간단한 화폐방정식 MV=PY에서 화폐유통속도(V)가 변하지 않는다면 물가(P)는 통화량(M)의 변수가 된다. 과거에는 이래저래 돈이 돌아가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물가를 상승시켰지만, 21세기 들어 상당기간 화폐유통속도 하락폭이 커지며 물가안정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자 돈을 한정 없이 찍어내도 문제없다고 착각하다가 ‘유동성의 역습’을 받아 악성 인플레이션으로 시달리고 있다.

통화량을 똑같이 늘리더라도 산업구조, 유통구조 발달에 따라 생산성과 돈이 도는 속도가 변하면 물가에 미치는 영향도 달라진다. 예를 들면, 울릉도에서 잡은 오징어가 소비자 밥상에 오르려면 공판장, 중간상인, 소매상까지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최종 소비자 가격은 애초 경매가의 몇 배로 불어나게 된다. 오늘날에는 생산자와 소비자 직거래가 흔해져 화폐유통속도가 느려지며 중간마진이 줄어들어 물가안정에 기여했다. 게다가 지속적 기술혁신으로 생산성이 빠르게 향상돼 생산비가 줄어들었다. 확대재생산이 어려웠던 농업분야까지도 농업혁명 지속으로 생산성이 크게 진척됐다.

통화량 증가에 따른 물가상승요인을 화폐유통속도 저하에 따른 물가하락요인이 상쇄시키면서, 돈을 웬만큼 풀어도 물가가 오르지 않는 즐거운 현상이 벌어졌다. “화폐유통속도가 일정하다”는 전제조건이 크게 변해가자 금융정책 관계자들이 오판하기 쉬워졌다. 2000년대 초반 유동성을 확대해도 물가가 안정되자 (경제대통령으로 불렸던) 미 연준 의장 그린스펀은 경기상승세를 유지하기 위해 초저금리 정책을 펼쳤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갑자기 고금리로 선회해 2008년 국제금융위기의 원인이 됐다. 오늘날 전 세계 인플레이션 원인은 공급망 교란도 있지만 돈을 풀어도 물가에 큰 영향이 없을 거라고 착각한 중앙은행의 책임이 크다.

화폐방정식(MV=PY)에서 단기에 있어서는 일반물가는 돈이 도는 속도(V)에 따라 큰 영향을 받는다. 중장기로는 자산가격은 돈을 얼마나 풀었는지를 나타내는 유동성(M) 크기에 따라 더 큰 영향을 받는 모습이 관찰된다. 산업구조가 변하고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화폐유통속도가 떨어져 물가상승 압력이 줄었다. 더욱이 빅테크 산업 비중 확대와 중후장대 산업 축소로 부가가치 창출에 소요되는 생산비가 크게 줄어들었다. 시중에 풀린 유동성이 생산부문으로 흐르지 않고 자산시장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아베노믹스 이름으로 금융완화와 재정확대 정책을 펼치다보니 유동성이 부동산시장으로 몰려들어 8~9년간 50%나 올라 도쿄 지역은 부자가 아니면 살기 어렵게 되었다. 일반물가는 물가안정목표치까지 오르지 않아 엔화 가치가 50%가까이 떨어진 상황에서도 금리를 올리지 못한다. 물론 인구고령화로 미래가 불안한 노인들이 소비보다는 저축을 선호하기 때문에 물가상승이 어려운 까닭도 있다. 실제로 2022년 현재, 국고채금리(10년물)가 미국은 연 3% 후반에서 4%를 넘나들지만 일본은 0.25%선에서 묶여있다. 일본이 부동산 가격 상승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들과 정반대로 금리를 올리지 못하는 건 물가가 목표치에 미달하는 디플레이션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집값은 오르는데 물가는 오르지 않는 현상은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났다. 방만한 재정운용으로 크게 늘어난 유동성이 생산부문으로 흐르지 않고 자산시장으로 유입된 까닭이다. 돈을 계속 풀면서 “부동산만은 자신 있다”는 호언장담을 거꾸로 해석한 세대가 부채를 짊어지고 집을 마련했다가 금리가 폭등하자 이자부담을 견디지 못해 투매하는 아픔을 겪고 있다. 경기부진에 따른 수요부족으로 물가는 머지않아 잡히겠지만, 금리가 정상화될 경우 많이 풀린 돈이 어디로 방향을 바꿀지 모른다. 아무리 급해도 재정안정의 바탕위에 대책을 추진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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