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작가 이디스 워튼의 소설 ‘순수의 시대’에 나오는 대사이다. 뉴욕 사교계 인사들이 여자 주인공의 결혼생활을 둘러싼 추문에 대해 떠들자 이를 듣고 있던 남자 주인공은 남편이 아닌 아내에 대해서만 비난이 쏟아지는 부당함에 항의를 한다. 이 때 험담을 늘어놓던 사람은 어이없다는 듯이 남자 주인공에게 여자에게 남자와 똑같은 자유가 있냐며 반문을 한다.
소설은 이렇듯 당시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사회적 관습과 억압, 위선적인 잣대를 꼬집는다. 이지스 워튼이 ‘순수의 시대’를 발표한 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0년이고, 소설의 배경은 그보다도 이전인 1870년대이다.
벽화의 내용은 윤 전 총장의 대선 후보로서의 능력이나 자질과도 관련이 없고, 그 가족을 둘러싼 비리나 부패 문제를 비꼬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김씨의 사업체나 그의 모친을 둘러싼 의혹을 제기했다면 정당한 정치적 비판이나 풍자라고 볼 수 있었겠지만 벽화의 내용은 오로지 김씨를 ‘조신하지 않은 여자’로 낙인찍고 조롱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번 논란은 사실인지 아닌지, 윤 전 총장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는지 반대하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여성에 대해 여전히 갖고 있는 사회적 편견과 억압을 되짚어 보아야 하는 문제이다.
서점의 주인은 벽화에 대해서 정치적 의도가 없는 단순한 ‘풍자’였다고 해명했다. 그의 말대로 그의 의도는 한바탕 웃고 말자는 풍자였을지 모른다. 그런데 여성의 과거 이야기가 사람들이 재미있어하는 풍자의 대상으로 먹힌다는 사실에는 우리 사회가 여전히 여성에게 전형적인 ‘참한 여성’을 강요하고 그렇지 않은 여성은 비난받아야 하는 존재로 보는 시각이 깔려있다. 재미와 웃음도 사회적으로 합의된 맥락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신하지 않은 여자’라는 말은 써도 ‘조신하지 않은 남자’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성차별을 없애고 양성 평등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법과 제도를 고치고 강압적인 처벌을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제 아무리 좋은 법과 제도가 만들어져도 “여자에게도 남자와 똑같은 자유가 있는 것 같나?”는 1870년대의 인식이 계속 되는 한 젠더 갈등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번 벽화 논란처럼 은연중에 내재화된 여성에 대한 편견을 별거 아닌 일로 치부하지 않고 민감하게 인식하는 움직임이 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