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제공] 한독약품(47년), 유한양행(43년). 이들은 유례없이 40년 이상을 한해도 빠짐 없이 흑자를 내 주주들에게 배당을 해온 ‘알토란 기업’이다. 과연 그 비결은 무엇일까. 두 회사의 최고경영자(CEO)가 스스로 진단한 ‘장수 흑자배당의 조건과, 위기를 기회로 바꾼 경영노하우’를 두차례에 나눠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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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과 신뢰"
한독약품의 50년사를 일궈낸 김신권(金信權·83) 회장·김영진(金寧珍·49) 부회장, 두 부자가 가장 소중히 지켜온 경영철학이다. 김신권 회장은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만상’(灣商·압록강 주변을 무대로 중국과의 보따리 무역을 주도했던 조선 상인들)의 후예다. 15세 때 병원 심부름꾼에서 출발, 제약업계의 거물로 성장한 억척스러움은 아마도 ‘만상의 유전자’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김 회장은 ‘혁신’을 ‘새로움을 향한 변화’로 규정한다. 50년대 초반 부산 국제시장에서 처음 좌판을 깔고 의약품 판매를 시작했을 때부터 몸에 밴 경영철학이다. 한국전쟁 직후인 57년, 당시로선 ‘무모한 시도’였던 외국제약회사와의 기술제휴에 발벗고 나선 것도 ‘혁신’만이 살 길이란 믿음에서였다.
한독약품은 64년 어렵사리 독일의 세계적인 제약·화학회사 훽스트의 자본을 끌어들여와 제약업계에서 처음으로 합작회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김 회장이 선진국 기업과 손잡는 길만이 열악한 국내 제약산업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김영진 부회장은 “훽스트와의 제휴를 통해 한독약품은 의료·제약 수준이 열악했던 1950년대 후반부터 국내 소비자들에게 뛰어난 성능의 의약품을 공급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독약품은 1980년대의 침체기도 혁신경영으로 돌파했다. 당시 제약회사들은 제약사 간의 과다한 가격경쟁과 금융비용의 증가, 우수한 인재의 고갈로 불황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한독약품도 위기를 맞았다. 1985년부터 1990년까지 6년 동안 매출액은 고작 100억원밖에 늘지 않았지만, 부채는 200억원으로 급증했다. 기업 위상도 제약업계 랭킹 6위(1980년)에서 12위(1985년) 14위(1990년)로 하락을 거듭했다.
이때 한독약품은 지금의 김영진 부회장을 중심으로 구조개혁에 나섰다. 김 부회장은 “우선 100여개의 제품 수를 절반 수준인 50여개로 줄여 회사의 역량을 핵심 제품에 집중하는 ‘선택과 집중’ 전략을 택했다”고 말했다. 매출 감소를 각오한 결정이었다.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중간관리자인 과장급에게까지 일부 전결권을 넘기는 등 경영시스템도 대폭 손질했다. 이 같은 혁신경영은 1990년대 재성장의 발판이 됐다.
한독약품의 또 다른 경영철학은 ‘신뢰경영’이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합작회사인 한독약품은 파트너인 훽스트(현재의 아벤티스)와 40년 넘게 같이 일했다. 그동안 쌓인 신뢰는 외환위기 직후에 빛을 발했다. 외환위기로 환율이 급등하고 이자율이 높아지면서 한독약품도 수익성이 악화됐다.
공장 건설을 위해 산업은행에서 차입한 외화대출에서 대규모 환차손이 발생한 것도 회사를 압박했다. 그렇지만 위기가 닥치자 40년 친구인 훽스트가 가장 먼저 손을 내밀었다. “훽스트는 200만마르크를 지원했을 뿐 아니라, 98년 1월에는 아시아지역 자금담당총책임자가 직접 한국을 방문해 우리가 외국계 은행들로부터 좋은 조건으로 신규 자금을 빌릴 수 있도록 도왔다”고 김 부회장은 말했다. 그 결과 한독약품은 창사 이래 44년 동안 지켜왔던 흑자경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김 부회장은 “신뢰경영은 상대방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경영에서 비롯됐다”면서 “한독약품은 사업 파트너뿐 아니라 주주와 직원·소비자로부터의 신뢰도 소중하게 여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