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칸 영화제에서 호평 받은 후 1000만 관객 영화가 됐다. 사실 괴물이 등장하는 ‘괴수 장르’는 다소 마니아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물’이 이런 초대박 영화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괴수 장르가 아닌 ‘재난 영화’로 소비됐기 때문이다. 갑자기
한강변에 출몰해 무차별로 사람들을 공격하고 죽이는 괴물보다, 이런 뜻밖의 재난에 정부가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더 집중했던 것이다. 결국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컨트롤 타워 부재의 상황 속에서 괴물과 싸우는 건 딸을 구해내려 사투를 벌이는 박강두(송강호 분)네 가족의 몫이 됐다. 이러한 봉준호 감독 특유의 풍자와 비판의식을 담은 ‘괴물’은 마침 그 해 여름에 벌어진 수재와 연결되면서 엄청난 반향을 이끌었다.
‘괴물’의 성공 이후, 여름 블록버스터 시장은 이른바 ‘한국형 재난영화’를 앞세워 잇따른 성공을 일궈냈다. 2009년 개봉한 ‘해운대’가 그랬고, ‘연가시’(2012년 450만 관객), ‘타워’(2012년 510만 관객), ‘감기’(2013년 300만 관객) 같은 작품들이 그랬다. 최근에는 갑자기 출몰한 좀비떼들과 부산행 KTX에서 벌어지는 사투를 그린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이 좀비 장르를 ‘한국형 재난영화’ 방식으로 해석해내며 큰 성공을 거뒀고 ‘판도라’, ‘터널’에 이어 지난해까지도 ‘엑시트’와 ‘백두산’이 모두 여름 블록버스터 시장을 강타했다.
사실 재난영화가 여름 블록버스터 시장의 대박 아이템이 된 것은 우리네 현대사에 남겨진 여러 상처들과 무관하지 않다. 성수대교가 붕괴(1994년)됐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으며(1995년), 대구지하철에서는 방화로 인한 참사(2003년)를 겪었다. 이런 재난들은 2007년 태안반도 기름유출 사고, 2014년 세월호 참사, 2015년 메르스 사태로 계속 이어졌다. 재난이 터질 때마다 ‘안전불감증’을 이야기하며 이에 대한 정부의 미온적인 대처를 질타했지만, 사고는 계속 터졌다. 대중은 심지어 ‘재난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컨트롤 타워 부재와 재난마저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정치권을 비판했고, 결국 문제 해결을 위해 뛰는 건 국민들이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 재난영화들은 국민들의 이런 인식들을 강화시켰다. 재난 자체가 보여주는 끔찍함과 그 안에 담겨지는 휴머니즘 같은 것과 더불어 컨트롤 타워 부재는 화두처럼 영화의 중요한 상황으로 제시되곤 했다.
컨트롤 타워 부재가 만들어낸 인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민적 분노를 일으켰던 세월호 참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문재인 정권의 출범에 중요한 이슈 중 하나였다. 그러니 이번 코로나19에 정부가 기민하고 투명하게 대처한 건 당연한 일이면서 그간 ‘재난공화국’을 경험하며 민감해진 민심을 반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질병관리본부 정은경 본부장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뤄진 차분한 브리핑은 투명한 정보 공개를 통해 국민들을 안심시켰고, 확진자가 급증한 대구에서 의료진 부족을 호소했을 때는 전국 각지에서 소방관, 공무원, 의사, 간호사들이 자원해 감으로써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해외에서 이른바 ‘K방역’이라 부르는 것의 실체는 다름 아닌 민관이 함께 공조함으로써 이뤄진 성과였다.
코로나19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재확산할 위기마저 보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많은 재난영화들이 모의시험처럼 보여줬던 결과들을 잘 알고 있고, 보다 적극적이고 즉각적인 대처만이 더 큰 참상을 막을 수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 게다가 이미 한 차례 겪은 코로나19의 경험 역시 무엇이 해법인가를 경험하게 했다. 그러니 ‘재난공화국’이라 불릴 것인지 아니면 ‘K방역’이라 불리게 될지는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비관할 필요는 없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경각심을 정부도 국민도 공유하고 일상을 살아가는 것만이 이 재난을 극복하는 길이다. 더 이상 여름 블록버스터 시장에 재난영화가 흥행공식으로 서지 않는 그런 날들을 꿈꾼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