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를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단순히 부를 평가하는 시대는 지났다. ‘집 있으면 부자, 전세 살면 서민’이라는 말도 이제는 옛말이다. 아파트에 대한 인식이 소유에서 거주로 바뀌고 주택가격 인상에 대한 기대가 줄면서 집을 사지 않는 자산가가 크게 늘었다. 게다가 웬만한 집값을 능가하는 고가 전세가 속출하면서 자가와 전세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평범한 직장인은 차치하더라도 고소득 전문직도 올라갈 수 없는 상위 1% 전세가 우리 주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위치한 갤러리아 포레의 전용면적 217㎡ 전셋값은 20억~22억원선이다. 그보다 작은 전용 168㎡은 17억원 안팎이다. 평균 연봉 5000만원을 받는 직장인이 30년 이상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전용 168㎡ 전세에 살 수 있다. 이 아파트는 2008년 분양 당시 평균 분양가가 3.3㎡당 4390만원으로 역대 최고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시선을 강남권으로 돌리면 비슷한 전세아파트가 즐비하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마크힐스 1, 2단지 전용 202㎡의 전세값은 28억원선이다. 전셋값만 가지고도 서울 외곽의 3억원짜리 아파트 10채를 살 수 있다. 삼성동 아이파크 전용 156㎡의 전셋값 시세도 16억원선에 형성돼 있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전셋값이 12억원(9월 기준)인 초고가 아파트는 서울에만 6116가구가 몰려 있다. 전국적으로는 상위 0.1%, 서울에서는 0.5%에 들어가는 전셋값이다. 특히 강남구(3317가구)와 서초구(2708가구)에 대부분이 집중돼 있다. 이런 초고가 전세들은 ‘전세대란’ 같은 뉴스와도 무관하다.
금액을 조금 낮춰 전셋값이 9억~12억원 이하 아파트는 서울에만 1만 4671가구로 상위 1.7%(전국 0.4%)에 속한다. 서울 지역 외에는 240가구밖에 없다. 전셋값이 6억~9억원 이하 아파트는 서울에서는 상위 9%, 전국적으로는 상위 2% 안에 들어간다. 강남구만 따지면 상위 35%까지 밀린다. 전국 8만 6345가구 중 89%(7만 7097가구)가 서울에 집중돼 있다.
서울 하위 10%..지방에선 ‘중산층’
시선을 가장 낮은 쪽으로 옮기면 서울에서도 1억원 수준의 아파트 전세를 찾을 수 있다. 서민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서울에서 전셋값이 1억원 이하인 아파트는 4만3639가구로 서울기준 하위 3.6%(전국 14.6%)에 속한다. 금천구 독산주공14단지 전용 38㎡의 전셋값은 1억원, 같은구의 시흥동 현대아파트는 전용 49㎡의 전셋값이 9000만원이다.
이보다 조금 나은 1억~2억원 이하 아파트는 서울에서는 하위 20% 수준이지만 전국적으로는 하위 57.7%에 속한다. 서울에서는 하위층에 속하지만 지방으로 내려가면 일반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얘기다. 아파트의 면적이나 생활환경도 더 낫지만 직장 등의 이유로 내려갈 수 없는 상황이다.
서울에서 가장 많은 전세아파트 가격대는 3억~6억원 이하와 2억~3억원 이하로 각각 45만 5916가구와 39만 2251가구다. 점유율도 각각 37.5%(전국 14.5), 32.2%(25.7%)에 이른다. 8월 기준 KB국민은행이 집계한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 4억 8600만원임을 고려하면 일부 대출을 받아 충분히 내집마련을 고려할 만하다. 대출이 부담스러우면 2억~3억원대 수도권 아파트도 꽤 있다.
하지만 교통, 육아, 교육, 잦은 회식과 야근 등 한국사회의 현실을 생각하면 내 집 마련이 쉽지 않다. 경기침체, 고령화 등으로 주택시장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점도 주저하게 한다.
안지아 부동산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집을 살 능력이 되는 많은 전세세입자가 집값이 오를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면서 “한국 사회에서 부동산은 핵심 자산이다 보니 실제 거주 목적이라도 투자 가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