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초라한 집 한 채와 소나무·잣나무 네 그루가 한겨울 추위 속에 서 있는 모습이 쓸쓸함을 자아낸다.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가 1844년 제주 유배지에서 그린 ‘세한도’(歲寒圖)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자신에게 매년 책을 보내준 제자 이상적(1804∼1865)의 곧은 인품을 소나무에 빗대어 그렸다. 김정희는 자신의 달라진 처지와 관계없이 변함없는 의리를 보여주는 제자를 보며 ‘추운 겨울이 되고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 걸 알게 된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고 했던 ‘논어’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세한도에는 김정희의 ‘세한’(歲寒)이 담겼다. ‘세한’은 설 전후 혹독한 추위, 인생의 시련과 고난을 말한다. ‘세한도’는 전문화가의 그림이 아니라 선비가 그린 문인화의 대표작으로 인정받아 국보(국보 제180호)로 지정됐다. 일제 강점기인 1943년 컬렉터이자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거금을 들고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인 소유자로부터 세한도를 사왔다. 손재형이 해방 후 정치에 뛰어들면서 손세기 집안 소유가 됐고, 그 아들 손창근 씨는 아무런 조건 없이 세한도를 국가에 기증했다.
| 김정희 ‘세한도’(사진=국립중앙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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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세한도’가 최근 재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 기증관에서 4개월간 특별 공개된다. 2년여의 정비를 마친 기증관에서는 국보와 보물 총 1082건, 1671점을 선보인다. 이 중 ‘세한도’와 윤동한 씨가 기증한 ‘수월관음도’는 5월 5일까지만 한시적으로 전시한다. 윤성용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개편한 기증관을 통해 문화유산의 기증과 나눔의 소중한 가치가 더 널리 알려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번에 선보이는 기증품 중에는 이홍근 기증 ‘분청사기 상감 연꽃 넝쿨무늬 병’(보물)과 이근형 기증 ‘이항복필 천자문’(보물), 국립중앙박물관회 기증 ‘나전경함’(보물), 손기정씨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기념으로 받아 기증한 ‘고대 그리스 청동투구’(보물) 등 국가지정 문화유산이 다수 포함돼 있다. 국보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제15’는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극복하고자 조성한 초조대장경의 하나로, KBS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시대 배경이기도 하다.
| 재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 기증관의 모습(사진=김태형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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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품들은 기증자의 애틋한 스토리가 더해져 가치를 더한다. 기증자의 면면을 보면 사업가가 제일 많고 변호사와 의사, 예술가, 외국인도 있다. 전 세계에 46점 남짓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진 고려시대 ‘수월관음도’는 윤동한 한국콜마홀딩스 회장이 기증했다. ‘수월관음도’는 불경인 ‘화엄경’의 ‘입법계품’에 나오는 관음보살의 거처와 형상을 묘사한 회화다. 윤 회장은 일본 경매에 직접 뛰어들어 수십억원에 작품을 구입한 뒤 박물관에 기증했다. 이홍근 선생은 ‘도자기와 서화는 나만의 것이 아니다’라는 신념 아래 평생 모은 4000여 점의 문화유산을 기증했다. 손창근 씨는 부친과 자신이 대(代)를 이어 모은 이른바 ‘손세기·손창근 컬렉션’ 300여 점을 박물관에 흔쾌히 내놨다.
전시장에는 투명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을 활용해 전시품을 배경 영상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2월부터는 인공지능 전시 안내 로봇 ‘큐아이’가 전시 구성을 설명할 예정이다.
| ‘수월관음도’(사진=국립중앙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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