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중앙은행의 신뢰다. 중앙은행의 신뢰가 추락하면 어떤 정책도 먹히지 않게 된다. 일본은행(BOJ)이 대표 사례다. 일본은행은 단기금리(일본은행 당좌예금 일부)를 마이너스(-) 0.15%로 유지하고 상장지수펀드(ETF) 등을 매입하는 돈 뿌리기를 하고 있지만 디플레이션 학습 효과에 올해 물가상승률이 0%대로 전망되고 있다. 자산 양극화, 기후변화에 따른 금융불안 등까지 중앙은행에 요구하는 역할은 많아지는데 그 수단은 제약되고 있다.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향후 경기 상황을 토대로 앞으로 통화정책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 예고하는 ‘포워드 가이던스’가 코로나 장기 확산에 무너져 버렸다.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작년 2월까지만 해도 물가상승률이 2%를 달성하려면 3년 이상 걸릴 것이라고 밝혔지만 두 달 만인 4월 물가상승률은 5%를 돌파했다. 작년초 조 바이든 대통령의 돈 뿌리기와 연준의 양적완화(QE)가 맞물리면서 3월엔 미 10년물 국채 금리가 1.7%를 넘어섰다. 11월 미국은 물가가 6.8%나 올라 인플레이션이 일시적이란 파월 의장의 발언은 틀린 말이 됐다.
이러다 보니 정책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빌렘 부이터 컬럼비아대 교수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에 칼럼을 통해 평균물가목표제(AIT)는 연준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라고 평가했다. 과거 저물가에 취해 물가상승을 너무 안일하게 대응하려고 했다는 지적이다. 호주 중앙은행은 2024년 4월 만기 도래하는 국채 3년물 금리를 0.1%로 유지하는 수익률곡선제어(YCC)를 채택했지만 작년 11월, 도입 1년 8개월만에 폐지해야 했다. 호주 물가상승률이 3%대를 기록, 국고채 3년물 금리가 1% 넘게 뛰자 호주 중앙은행이 금리를 끌어내리는 데 돈을 퍼부을 것이란 믿음이 흔들린 결과다.
강삼모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포워드 가이던스는 중앙은행이 금리를 갑자기 올리거나 내렸을 때 충격이 크기 때문에 시장이 완만하게 충격을 흡수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인데 만약 통화정책이 포워드 가이던스대로 가지 않았을 경우 시장은 더 큰 충격을 받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며 “코로나로 어느 한 쪽 방향을 얘기하기 어려운 상황에선 문제가 있긴 하지만 두루뭉술하게 포괄적으로 얘기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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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정책 수단이 실패하거나 약해진 상황에서 중앙은행에 요구하는 역할들은 더욱 더 많아지고 있다. ‘물가안정’ 외에 과잉 유동성에 따른 자산가격 거품, 가계부채 등 ‘금융안정’은 물론 ‘고용안정’까지도 중앙은행의 몫으로 요구되고 있다. 나라별로 제각각 가중치가 달라지고 있지만 공통점은 수단은 제한적인데 요구 사항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뿐 아니라 자산 양극화, 기후변화 대응에서의 중앙은행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저금리가 주택 가격 등을 끌어올려 자산 양극화가 심해졌다는 평가가 나오는 반면 작년 9월 잭슨홀 미팅에선 아미르 수피 시카고대 교수와 아티프 미안 프리스턴대 교수 등이 고소득자의 과잉 저축이 자연 이자율을 끌어내리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는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자산 불평등 해소 등에 신경 써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또 국제결제은행(BIS)이 ‘그린스완(Green swan)’이란 용어로 기후변화가 가져올 경제위기를 경고한 만큼 중앙은행도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최근 신년사를 통해 “저탄소 경제로의 이행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한은이 가진 정책 수단을 활용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일본, 중국, 스웨덴 등은 저탄소 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을 강화하는 정책을 이미 시행 중이다.
한은 조사국장 출신의 장민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중앙은행이 금융중개지원대출로 (저탄소 기업을 지원하거나) 공개시장조작 대상 채권에 그린본드를 포함하는 등 탄소 배출이 적은 우수 기업에 자금 지원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수단은 부족하지만 소득 불평등 해소에도 통화정책이 신경을 써야 한다”고 밝혔다.